세상 대부분의 저항가는 쉽고 단순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부터 ‘대한민국 헌법 제1조’까지. 사람들이 광장에서 한목소리로 제창하는 곡은 대개 짧고 간단한 멜로디가 여러 번 반복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외우기 쉽고 부르기 쉬우며 기억에 남는 강렬함과 반복성을 지닌 선율이야말로 다양한…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이고 즉각적으로 날 무장해제하는 음표의 소대가 있다. 이를테면 라디오헤드의 ‘Creep’을 여는 기타의 떨리는 G메이저 아르페지오 몇 개 음. 아니면 영화 ‘미션’에 삽입된 ‘Gabriel′s Oboe’가 시작되는 ‘라시라솔라∼’. 2016년 8월 26일 오…
서기 2002년. 돌아선 연인의 마음을 편지 한 통, 노래 한 곡으로 돌릴 수 있는 특급 서비스가 있었다. B 음원 사이트의 ‘음악메일’ 서비스. 인공지능 아닌 인간 지능을 이용하는 번거로움이 따르지만, 심정을 대변할 노래 한 곡과 배경화면을 고른 뒤 열심히 편지를 써서 수신인 e메…
해질 대로 해져서 그만 소심함과 무기력의 스프링이 제멋대로 비어져 나온 싸구려 가짜 가죽 소파. 따지고 보면 그게 내 20대였다. 달팽이처럼 몸을 묻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러운 강물처럼 저절로 흘러가던 시간. 위대한 부유의 나날. 미국 펑크 록 밴드 그린 데이는 그 무렵 내…
대중음악 팬들에게도 2016년은 악몽 같은 해다. 1월 데이비드 보위를 필두로 프린스, 비틀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 이글스 멤버 글렌 프라이, 리언 러셀, 그리고 14일 들국화의 전 기타리스트 조덕환까지…. 큰 별들이 잇따라 우주공간으로 날아갔다. 2011년 조덕환이 58세에야 …
필레는 어두운 절벽 틈에서 발견됐다. 짐작했던 대로다. 햇빛을 받지 못한 그는 탈진해 잠들어 있었다. 로제타는 그런 필레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10년간 65억 km를 날아왔다. 고향 지구별에서 연락이 왔다. 마지막 임무. 너무도 기다린 안식이다. ‘로제타, 67P에 충돌해 생을 마…
‘그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에/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두 눈 속에 담게 해 주오.’(‘더 늦기 전에’ 중) 1992년 서울에서 환경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가 열렸다. 한국판 ‘We are the World’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승환, 신승훈, 넥스트, …
‘소오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계기로 요즘 말마따나 ‘소오름’ 돋는 노랫말을 만났다. 밥 딜런이 무려 반세기 전인 1965년에 발표한 ‘Subterranean Homesick Blues’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소방호스 들고 다니는/사람들 곁에 있지 마라/콧물…
‘워이야아아 워∼우 워∼ 아이야∼.’ 독일 음악가 이니그마의 ‘Return to Innocence’(1994년)가 떠올랐다. 노래를 여는 대만 원주민 아미족의 저 전통 민요 소리.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보고서 말이다. 시와 노래는 본디 하나였다. 제사 때 읽는 축문이…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 어떤 거짓말은 자신마저 속였다. 사실 난 불온한 욕망이나 한심한 나태, 아니 그만한 의미조차 없는 아무것도 아님의 결정체에 불과했지만 사회나 가족의 꽤 충실한 일원이자 제법 건전한 사고의 소유자인 것처럼 연기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비…
만년설처럼 내려앉은 백발은 어쩌면 억겁의 비밀을 간직한 빙하인지 몰랐다. 왜냐하면 그 아래로 갈매기나 파도처럼 물결치는 겹겹의 이마 주름을 따라 먼 옛날의 이야기를 노장의 입으로 흘려보내는 듯했기 때문이다. 중력이 노장에게 한 일은 노화가 아니라 그토록 유장한 곡선과 흐름을 선물한 것…
12일 오후 8시 32분. 지진이 일어난 그 순간에 난 서울 종로구 효자로의 작은 녹음 스튜디오에 있었다. 이탈리아 재즈 피아니스트 스테파노 바탈리아(51)의 솔로 콘서트 때문이다. 공연 시작 직전인 8시 정각. 기획자인 김충남 플러스히치 대표가 간이 객석을 향해 말했다. “소…
2008년 3월 18일 밤을 기억한다.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들어찬 8000명의 관객과 함께 난 노래의 날개 위에 올라탔다. 육중한 여객선을 끌어내린 검푸른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듯 아찔했다. 171cm의 키에 깡마른 몸매. 불과 1.5cm의 성대를 울리고 나온 소리가 장내 가…
21일 오후 7시 일본 지바 현에 위치한 QVC 마린 필드. 일본 프로야구팀 지바 롯데 마린스의 홈구장인 이 스타디움에 약 5만 명의 관객이 물샐틈없이 들어찼다. 20∼21일, 마린 필드와 인근 박람회장 마쿠하리 메세 일원에서 열린 대형 음악축제 ‘서머소닉 페스티벌’의 피날레, …
광복절과 말복이 지났음에도 열대야가 물러나지 않자 어젯밤 나는 안방에 설치된 ‘요금 도둑’, 그러니까 에어컨으로부터 머나먼 길을 도망쳐 이국의 눈 덮인 산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거실로 나가 리모컨을 마치 단검처럼 움켜쥔 뒤 TV를 튼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헤이트풀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