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대전에서 보냈다. 그때만 해도 별로 갈 데도, 할 것도 없었다. 어린이날이면 보문산이나 대청댐 유원지에 가서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걸 먹으며 건전한 하루를 보냈다. 어린이날이었던 5일, 몸만 큰 어린이인 내가 좋아할 만한 공연이 있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블랙 메탈 밴…
지적인 외모와 달리 내 독서의 절반 이상은 인생 초기 15년 안에 이뤄졌다. 꼬마 때 서가에서 ‘인도동화집’ ‘프랑스동화집’ 같은 걸 한 권씩 쏙쏙 빼 뒤적이던 재미는 쏠쏠했다. ‘오즈의 마법사’의 충격이 기억난다. 뇌가 없는 허수아비와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도 섬뜩했지만 꿈을 이…
21일 밤 일본 도쿄의 한 식당에 6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주로 밤에 활동하며 ‘짐승돌’로도 불리는 그들은 이날 ‘돌짐승’들과 맞붙게 된다. ‘짐승돌’이란 남성그룹 P를 가리킨다. 난 그들을 작년에도 도쿄에서 만났다. 그때 그들은 1만 석짜리 경기장에서 공연을 마친 뒤 취재기자단의 …
‘열심히 하다 보니 성공하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뭐, 그럴 수 있다. 대개의 동화, 전설, 민담, 자서전, 자랑은 열심히 하다 보니 성공한 이야기를 뼈대로 한다. 근데 ‘반드시 성공해야 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좀 다르다. 예측이 힘든 대중의 취향을 꿰뚫어 또 한 번 …
고심 끝에 입학한 불어불문학과는 내게 고작 1년간의 행복도 허락하지 않았다. 첫 한 학기는 고교 제2외국어 교육의 뒷심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학교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새내기였으니까. 문제는 1학년 2학기 초급회화(2) 시간에 불거졌다. 교수님은 프랑스 TV 뉴스의 정통 발음을 감상해…
대학 후배 M은 프랑스어에 대해서만은 원칙주의자다. 현행 외래어표기법은 프랑스어 발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시인 랭보(Arthur Rimbaud·1854∼1891)를 ‘행보’라 일컫는다. 주위에서 말려도 소용없었다. ‘삶의 행보’만 연상되면 다행. M이 …
지난 주말, 젊은 남녀 천재 뮤지션의 대결이 있었다. 캐나다의 일렉트로닉 뮤지션 그라임스(25)는 토요일에, 일본의 포크 팝 싱어송라이터 도쿠마루 슈고(33)는 일요일에 서울 서교동의 서로 다른 무대에 올랐다. 한날한시 한무대에서 겨루러 온 게 아니라 둘을 경합시킨 건 내 뇌였다. 결…
지금 근무의욕이 생길 리 없다. 지난주에 음악의 천국에 다녀온걸.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열린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 뮤직 페스티벌. 100개의 공연장에서 2000여 팀이 공연하는 그곳은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천국, 음악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딱 지옥이었다. 교…
냉철하기 짝이 없는 나도 한때 누군가에게 미쳐 본 적이 있다. 샤이니가 데뷔하기 몇 년쯤 전인가. 오늘처럼 화창한 오후의 캠퍼스. 어중간하게 기른 머리 아래로 검정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기타 가방을 멘 채 등교하는 이가 나일 확률은 그 캠퍼스에서 10분의 1쯤은 됐다. 상표도…
지난주, 스마트폰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다 원인 미상의 에러가 발생했다. 어찌된 건지 컴퓨터에 저장해둔 사진까지 다 날아갔다. 그 회사의 한국지사 서비스 콜센터는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에러 이전 백업 파일이 없으면 도와줄 수 없다. 안타깝다”고 했다. 클라우드에 백업해 둘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냉면은 랩보다 세다. 지난 주말, 별 생각 없이 e메일함을 열어봤다가 깜짝 놀랐다. 졌다. 냉면한테. E도 알아야 한다. 이런 굴욕. 지난해 여름, 미국의 유명 래퍼 E의 내한공연 뒤 노트에 랩 몇 자 끼적였을 때보다도 많은 독자 e메일이 답지한 것이다. 주인공은 냉…
이런! 음력으로도 새해가 일주일 넘게 지났구나. 양력 1월 1일에 야심으로 세운 신년 계획은 올해도 ‘실은 음력 설부터’라는 변명으로 미뤄졌다. 그 심정은 한국 땅에 살면서 미국 나이를 내세우는 심보만큼 얄팍하다. 1월 1일에 뭘 했더라. 어이쿠, 벌써 가물가물하네. 그래. 새벽같이 …
명절이면 유별난 향수의 고장으로 내려간다. 유명한 시 ‘향수’가 탄생한 곳이다. 원래 고향은 대전이지만 스무 살 무렵 가족이 여기에 둥지를 틀면서 제2의 고향이 됐다. 올해는 귀성한 김에 그 시인의 생가도 10년 만에 가 봤다. 시 속에서처럼 휘돌아 나가던 실개천은 현대식 난간과 교량…
“나니진다요(어느 나라 사람이냐). …나니진다요?” 지난달 29일 밤, 일본 도쿄 시부야의 스크램블 건널목 앞. 40대 후반쯤 돼 보였다. 술을 잔뜩 마신 모양이었다. 길을 물으려 “익스큐즈 미”를 했을 뿐인데 그가 적대감을 보였다. 중국인 아니면 한국인인 줄 알았나 보다. 아저씨의 …
어릴 땐 음악을 잘 몰랐다. 아직도 그렇다. 근데 꼬마 땐 좀 알았던 것 같다. 형이 학교에 간 사이 그의 방에 들어가 그가 아끼는 기타를 몰래 꺼내서 잡고 아무렇게나 퉁겨대면서 아무 멜로디나 지어서 막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건 가히 프리 재즈(free jazz·기존의 화성 박자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