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봄 인천 옹진군 백령도의 부둣가. 바다를 향해 걸터앉은 서른한 살 청년 손도신은 입술을 꽉 깨물며 생각했다. ‘그래, 여기 들어와 살자.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자동차 영업, 양말가게…. 손을 대는 것마다 다 망했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땐 몸을 굴리며 어떻게든 살…
“귀를 의심했어요. 대한장애인스키협회 임원이라는 사람 입에서 ‘장애인이 스키를 타는 것은 사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겁니다. 사는 것도 힘든 장애인이 무슨 스키까지 타느냐고.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이미 대중 스포츠가 된 스키가 왜 장애인에게는 사치가…
“이 아이는 내가 사주 공부시키겠다. 사주에 이 공부를 해야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와 있다.” 할머니께서 일곱 살밖에 안 된 딸에게 사주 공부를 시킨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이 들렸다는 얘기인가. 그것은 아니라는데, 딸이 사주 공부를 하면…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45)를 만난 때가 지난달 중순이었다. 그녀는 영화 ‘감시자들’의 흥행 성적이 500만 명을 넘으면 인터뷰 기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전작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성적(460만 명)을 뛰어넘은 뒤 기사가 나와야 기분이 좋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9일…
2005년 12월. 전남 목포시 용해동에서 악기상을 운영하는 홍의현 씨는 눈발이 흩날리는 궂은 날씨에 길을 나섰다. 악기 수리 공구함을 들고 찾아간 곳은 상점에서 1시간 정도 차를 몰고 가야 하는 전남 신안군 압해도. 섬에 위치한 아동복지시설 ‘신안보육원’이 홍 씨의 목적지였다. …
겨울이 막 시작되려는 1990년 11월의 미국 보스턴.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이름 모를 기업가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학생들을 위해 강연을 하러 왔다. ‘대우’라는 기업의 창업자라고 자신을 밝힌 50대 기업가는 유창하지는 않은 영어로 강연을 이어갔다. “앞으로 중국과 인도의 …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교실에는 지루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날은 부러진 바늘에 대한 한 부인의 애통한 심경을 담은 고전수필 ‘조침문(弔針文)’ 관련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1965년 60명 가까운 남학생들로 가득한 부산 영남상고(현 부산정보고) 교실. 그곳에서 부인과 바늘에 관한 이…
상승가도(上昇街道)였다. 번역해 내놓은 책 ‘로마인 이야기’는 열풍이었다. 신문에 번역자의 인터뷰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던 때, 여러 언론사 지면에 이름이 걸린 기사가 실렸다. 세간에 얼굴이 팔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열심히 하게 되고 성과도 좋아지는 선순환의 궤도에 올라탄 느낌…
“물 위에 뜬 백조라고요? 정확합니다.” 대통령 선거 다음 날인 20일 오후 2시 반. 피곤한 눈으로 PC 모니터를 보던 박종진 채널A 앵커가 말했다. 두 달 가까운 ‘대선 특별 근무’를 끝낸 뒤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얼굴은 피로로 벌겋게 달아올랐고 새치가 많은 앞머리 일부는 위…
노란 빛이 전등갓 아래로 부챗살 모양으로 퍼져 선반(旋盤)을 비췄다. 쇳조각을 바이스에 물리고 스위치를 ‘자동’으로 넣었다. 절삭기가 윙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깎여 나온 나선형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볼트 하나가 만들어졌다. 계속해서 새로운 쇳조각을 바이스에 고정시켰다. 볼트가 하…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추석을 맞아 외가 식구들이 모인 자리. “노래 한 곡 하라”는 친척들의 계속되는 권유에 난감해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중학생 최백호(62·가수·사진)가 나섰다. “제가 할게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 중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튼 수상쩍은 곳이었다. 건물 어디선가 새어나오는 낯선 음악이 귀를 자극했다.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건너온 음악이겠지. 그런가 하면 익숙한 장구 소리도 더러 들리는 것이었다. 저긴 대체 뭘 하는 곳일까? 누가 있는 거지? 집으로 가는 길에 늘 지나치다 보니 궁금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고개를 드니 굉장히 잘생긴 남성이 보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용모가 추한 사람에게는 부모님이 시켜도 인사를 않던 열 살 최완수(70·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였다. 마음에 쏙 드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머리가 이상했다. 갓을 쓴 …
《“너 그러다 국제 거지 된다.” 독일(당시 서독)로 떠난 지 9년 반, 잠깐 들른 서울에서 형님이 말했다. 잔말 말고 이력서나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만화를 더 배워보겠다고 유학 가서 택한 디자인 공부가 10년 가까이. 얼른 끝내고 너희 나라로 가라는 뜻이었는지 성적은 좋았고 총장상도…
《 ‘한나 보세요. 아빠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이름 하나 하나를 놓고 기도하고 있어요. 한나는 오케스트라 전체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단원 각자와 1 대 1로 만나는 거예요. 단원들 한 명, 한 명의 영혼이 다 소중하답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아빠는 어김없이 e메일을 보냈다. 15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