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등 뒤를 지나치는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여기저기서 “쟤, 공대 다닌대”라는 수군거림이 들렸다. 1984년 6월 20일 오후, 제14회 동아무용콩쿠르가 열린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대기실. 본선 진출자를 소개하는 팸플릿에 홍승엽(50·국립현…
《 “8일 아침 6시 반경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 와우산 기슭의 와우시민아파트 제15동의 콘크리트 5층 건물이 무너져 주저앉는 바람에 안에 살고 있던 열네 가구 예순한 명과 아래 주민 세 가구 열두 명 등 모두 일흔세 명이 깔렸습니다. 오후 2시 현재 열한 명은 시체로 발굴되고 서른…
《 ‘급상경(急上京).’ 스승이 보낸 전보에는 단 석 자만 쓰여 있었다. 평택 미군부대와 오산 미사일기지 미군 막사를 지으며 양식 건축에 어지간히 맛이 들릴 때였다. 서둘러 짐을 꾸려 서울 아현동의 댁으로 향하니 스승은 안 계시고, 숭례문으로 가보라는 말만 들었다. 탄성이 새나왔다. …
《 멋모르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서면 그냥 재미날 것 같았다. 미군이 던져주던 초콜릿 맛도 새삼 기억이 났다. 딱 세 밤만 자고 오면 된다고 했다. 얼음장 같던 1월의 대동강을 건너면서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 밤이 지나 돌아올 때는 대동강이 …
《지긋지긋한 한국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10여 년 동안 50편 넘게 영화를 찍으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떠나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주어진 생애 첫 외유(外遊)였다. 그렇게 바라던 기회였다. 여기 눌러앉으면 되겠다 싶었다. 돌아가는 날 잠적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노동을 하…
《 굿나이트 키스, 그러고 “잘 자요, 캐시” “잘 가요, 돈”. 사랑하는 여인을 집에 들여보낸 돈(진 켈리)은 그를 기다리던 차를 보낸다. 잠시 우산을 쓰고 걷다가 환희로 가득한 얼굴에서 새나오는 흥얼거림. “두비두∼두, 두비두비두두∼” 갑자기 우산을 접고는 가로등 기둥에 매달려…
■수술실의 록 음악“휴∼.” 얼마 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나온다. 안도의 한숨이다. 다행히 큰 고비는 넘긴 듯하다. 실핏줄이 터질 듯 그의 눈에 들어갔던 힘도 그때서야 좀 풀린다. 남은 건 환부를 덮는 정리 수술. 수술 장갑을 바꿔 끼러 가는 길에 그가 음악을 튼다. 그…
《 “넌 생긴 건 중국 사람인데 왜 미국 영어를 쓰니?” 그 아이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미안한 기색조차 없었다. 조금 지나자 옆에 있던 친구들까지 거들었다.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마치 거대한 벽에 둘러싸인 기…
《 햇볕이 내리쪼였다. 찌는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무거워서일까. 아직 여드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대학생 허재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시끌벅적한 식당에 도착하니 구석 자리에 아버지가 있었다.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눈치만 살피게 됐다. 묵직한 목…
《 일곱 살 소녀는 이리저리 꺾이는 골목이 어지러웠다. 집에서 몇 개, 아니 몇십 개의 골목을 지나야 학교에 들어서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도저히 못 다니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밑 남동생이 ‘가이드’를 자처해 다섯 살배기가 누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누나가 공부하는 동안 동생은 운동장 …
《 난장(亂場). 충남 조치원에서 충북 청원군 강내면을 끼고 청주 쪽으로 흐르는 미호천 물가 모래사장이 시끌벅적하다. 쌀 보리 콩 같은 곡물, 소 돼지 같은 동물, 다양한 산나물, 각종 옷감과 그릇, 일용품에 소금과 해산물이 그득그득 쌓인다. 한쪽에서는 소싸움과 닭싸움이 벌어지고, 씨…
노래를 들으니 그냥 생각났다. 하도 많이 춰서 몸이 기억하고 있는 동작들. 하루 만에 안무(按舞)를 다 짜버렸다.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 한 시대를 휘저었던 몸짓과 마주한 걸그룹 티아라 멤버들은 조금 당혹했다. 사흘 전 “1970년대 디스코가 콘셉트야. 도와줘”라며 걸어온 옛 춤 친…
빈 소주병이 연못가를 따라 죽 늘어설 양이면 으레 뒤를 돌아봤다. 동랑 유치진(東朗 柳致眞·극작가·1905∼1974) 선생과 부인이 살던 사택(舍宅) 창문이 열리며 “야∼” 하는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었다. “예∼” 하고 앉아 있던 후배가 달려가면 동랑 선생은 소주를 한 병 주셨다. 때…
“사람이 한 우물을 파야지….” 숱하게 들었다. 형님은 “그렇게 미대에 가고 싶다더니 막상 들어와 놓고는 왜 문학이나 연극판으로 돌아다니느냐”고 못마땅해했다. 불민한 제자가 화폭에 쏟는 끼와 열정의 깊이를 알아챈 은사는 그의 예술적 산만함이 못내 불만이었다. 재수를 해서 1973년 입…
1986년 9월 추석날 오전 서울 명보극장 앞. 영화가 끝나고 몰려나오는 관객 중 한 중년남성이 감독 배창호(58)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얼굴에는 ‘저 따위를 영화라고 만들었냐’라고 질책하는 표정이 그득했다. 배창호로서는 처음 겪는 수모였다. 속도감 있는 이야기와 화면 전개로 이름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