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에서 이성부(1942∼2012)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
축구 장석주(1954∼) 어린 시절 공을 차며 내가 중력의 세계에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알아야 할 도덕과 의무가 정강이뼈와 대퇴골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변동과 불연속을 지배하려는 발의 역사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초록 잔디 위로 둥근 달이 내려온다. 달…
희망가 문병란(1935∼)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
‘가정’ 박목월(1916∼1978)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넘어짐에 대하여’ 정호승(1950∼)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 이상 검은 물 속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보석밭’ 성찬경(1930∼2013) 가만히 응시하니 모든 돌이 보석이었다. 모래알도 모두가 보석이었다. 반쯤 투명한 것도 불투명한 것도 있었지만 빛깔도 미묘했고 그 형태도 하나하나가 완벽이었다. 모두가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보석들이었다. 이러한 보석이 발아래 무수히 깔려 있는 …
‘인디오의 감자’ 윤재철(1953∼) 텔레비전을 통해 본 안데스산맥 고산지대 인디오의 생활 스페인 정복자들에 쫓겨 깊은 산 꼭대기로 숨어든 잉카의 후예들 주식이라며 자루에서 꺼내 보이는 잘디잔 감자가 형형색색 종자가 십여 종이다 왜 그렇게 뒤섞여 있느냐고 물으니 이놈은 가뭄에 강하…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1948∼1991)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
‘이 순간’ 피천득(1910∼2007)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
‘독(毒)을 차고’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마저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
‘겨울풍경’ 박남준(1957∼)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 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
‘공백이 뚜렷하다’ 문인수(1945∼ ) 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뗀 흔적 같다. 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 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 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 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 사방 벽이 거짓말 같이 더럽다. 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
‘비망록’ 문정희(1947∼ )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
‘인생’ 김광섭(1905∼1977) 너무 크고 많은 것을 혼자 가지려고 하면 인생은 불행과 무자비한 七十년 전쟁입니다 이 세계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신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낮에는 해 뜨고 밤에는 별이 총총한 더없이 큰 이 우주를 그냥 보라구 내주었…
‘구부러진 골목-산복도로·76’ 강영환(1951∼ ) 눈 선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살았다 바다도 더 많이 찾아와 주고 진하게 놀다가는 별이 있는 하늘동네 갈라섰다 다시 만나는 사람 일처럼 만났다 갈라지는 것이 골목이 할 일이다 오르막은 하늘로 가는 길을 내어 놓고 곧장 가서 짠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