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 이병률(1967∼) 가끔은 생각이 나서 가끔 그 말이 듣고도 싶다 어려서 아프거나 어려서 담장 바깥의 일들로 데이기라도 한 날이면 들었던 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거나 누이들이기도 했다 누운 채로 생각이 스며 자꾸 허리가 휜다는…
‘만약 내가……’ 에밀리 E 디킨슨(1830∼1886)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
‘끼니’ 고운기(1961∼ ) 멀쩡한 제집 두고 때 되어도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 도대체 집은 뭐하러 있는 거야?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는 질문도 굳이 마누라 타박할 문법(問法)은 아니지 차라리 못살았다는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새벽밥 해 먹고 들일 나가 날라 오…
‘대추와 꿀벌’ 박경리(1926∼2008) 대추를 줍다가 머리 대추에 처박고 죽은 꿀벌 한 마리 보았다 단맛에 끌려 파고들다 질식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여실(如實)한 한 자리 손바닥에 올려놓은 대추 한 알 꿀벌 반 대추 반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1921∼1984)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
‘추석 지나 저녁 때’ 나태주(1945∼)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날 저물 때까지 그때는 할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어머니도 계셨는데 어머니래도 젊고 이쁜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때는 내가 바라보는 흰 구름은 눈부셨는데 풀잎에 부서지는 바람은 속살이 파랗게 떨리기도 했는…
‘능금’ 김춘수(1922∼2004)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
‘비가 되어 내리면, 이산가족 눈물이’ 정성수(1945∼) 보이시지요, 어머니? 오늘도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서 개성의 허공 수없이 떠도시는 어머니 남한 하늘 속에 낮게 떠있는 구름자락 북한 하늘 속에 낮게 떠있는 구름자락 아시지요, 그것이 모두 남북한 이산가족이 흘린 눈물들이 …
‘여름밤’ 이준관(1949∼)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
‘휴전선’ 박봉우(1934∼1990)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
‘흑백사진-7월’ 정일근(1958∼)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
‘들리는 소리’ 원재길(1959∼) 1 바로 아래층에서 전기 재봉틀 건물 들어 올리며 옷 짓는 소리 목공소 전기톱 통나무 써는 소리 카센터 자동으로 볼트 박는 소리 굉음에 하늘 돌아보니 불빛 번득이며 먹구름 밑 낮게 나는 헬리콥터 어서 지나가면 좋겠는데 아까부터 시동 걸려 골목에…
‘문’ 이근배(1940∼) 내가 문을 잠그는 버릇은 문을 잠그며 빗장이 헐겁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한밤중 누가 문을 두드리고 문짝이 떨어져서 쏟아져 들어온 전지(電池) 불빛에 눈을 못 뜨던 버릇은 머리맡에 펼쳐진 공책에 검은 발자국이 찍히고 낯선 사람들이 돌아간 뒤 겨울 문풍지처럼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60∼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
‘내가 죽어보는 날’ 조오현(1932∼)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