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쓰는 아침’ 전윤호(1964∼)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이처럼 화창한 아침사직코자 하오니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재가해주시기 바랍니다머슴도 감정이 있어걸핏하면 자해를 하고산 채 잡혀먹기 싫은 심정에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오늘 오후부터는배가 고프더라도내 맘대로 떠들…
‘두꺼비’ 박성우(1971∼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 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
‘오십줄’ 박찬(1948∼2007)이러다 합죽이가 되겠다.지난 세월 너무 옹다물고 살다보니어금니에서부터 하나씩 뽑아낸 것이이제는 오물거린다.왜 말 한마디 하지도 않고왜 큰소리 한번 치지도 않고왜 소리내 한번 울지도 않고왜 벌컥 화 한번 내지도 않고속으로 이만 앙다물고 살았을까.별것도 …
‘나 하나 꽃 피어’ 조동화(1948∼)나 하나 꽃피어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말하지 말아라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결국 온 산이 활활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5만 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단추를 채우면서’천양희(1942∼)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단추를 채우는 일이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누구에겐가 잘못하고절하는 밤잘못 채운 단추가잘못을 깨운다그래, 그래 산다는 건옷에 매달…
‘거대한 소망’ 임보(1940∼)아, 그와의 첫 만남은 얼마나 황홀했던가?두메산골 한 촌놈이 열여섯 어느 봄날광주의 번화가 충장로 한 중국집에서그를 처음 만나 한 사나흘 밥맛을 잃었던일곱 살짜리 내 손주녀석은왜식집에서 가서도 그놈만 찾는,아니, 조선 팔도의 모든 어린이들이한결같이 좋아…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1941∼)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밤새도록 자지 않고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어머니 곁에서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빨간 화롯불 가에서내 꿈은 달아오르고밖에는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어머니의 나라어머니가…
‘태백산행’-정희성(1945∼)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태백에 가야겠다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올해 몇이냐고쉰일곱이라고…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1962∼)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가슴이 한참…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23∼2012)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여름에도 겨울에도낙제란 없는 법.반복되는 하루는 단 …
1세상에서 제일의 맛은 독이다.물고기 가운데 맛이 가장 좋은 놈은독이 있는 복어다.2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아름답다고 그들이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귀여운 새싹이 손을 타면애잎은 손독이 올라 그냥 말라죽는다.그들이 함부로덤부로 뱉어내는 말에도독침이 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별들이 보이지 않는다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별들이 보인다지금 어둠인 사람들만별들을 낳을 수 있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대한민국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 1위는 무엇일까. 퇴근 길 버…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서울 조카아이들이여그 까치밥 따지 말라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철없는 조카아이들이…
지상의 끼니 이기철종일 땀 흘리고 돌아와 바라보는식탁 위 밥 한 그릇나를 따라오느라 고생한 신발, 올이 닳은 양말불빛 아래 보이는
읽고 난 필요 없는 책들 정리해서도망 못 가게 노끈으로 사지를 단단히 묶어서가져가는 사람 있다기에 대문 옆에 내놨는데 일주일이지나도록 엄동설한에 쫓겨난 자식처럼 덜덜 떨고 있는것이 보기 안쓰러워 다시 창고에 들여놓고서,헌책 버릴 걱정 안하고 고무다라이나 엿 바꿔먹던옛날이 좋았다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