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한여름이면 전통 한옥에서 발은 필수품이었다. 강한 햇볕을 막아주면서 시원한 바람은 통하게 했고, 발 틈새로 바깥을 내다보면서도 멀리서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오늘날 도시의 빌딩 사무실과 아파트 주거공간에서 그 기능을 담당하는 게 블라인드이다. 어쩌면 우리 삶의 경계라는…
엄청난 자산가라면 최고의 건축가를 고용하여 근사한 건물을 짓고 또 거기에 자신의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꿈을 가질 만도 하다. 2014년 가을, 루이뷔통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명품그룹 LVMH재단은 새로 미술관을 신축하고 대규모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파리 근교 불로뉴 숲 끝자락, 프랑크 게…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수공적 예술은 같이 갈 수 있을까?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예술적 표현능력을 해방시키는가, 오히려 잠식하는가? 영국의 대표적인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최근 행보는 이 질문에 하나의 답을 제공한다. 그는 새벽 볕을 머금은 꽃과 창밖의 풍경을 …
인류의 문명과 산업 발달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달은 환경오염을 가져오기에 우리는 언젠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지구를 상상한다. 우리 눈에 친숙한 도시가 폐허로 바뀐 모습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내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이다. 차이궈창(蔡國强)은 화약…
우리의 통념상 미술작품이란 형태를 지닌 어떤 대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무형의 작업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1960년대부터 시작된 퍼포먼스다. 이는 대개 작가 스스로 퍼포머가 되어 한 번의 실행으로 끝나는 게 일반적…
전쟁이나 학살은 엄청난 수의 죽음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이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익명적이지 않다. 각자가 유일무이한 존재인 만큼 그 부재와 상실은 일반화될 수 없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는 뉴욕의 파크 애버뉴 …
사랑의 표현에서 가장 본능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신체 접촉이다. 예컨대, 애완견이 사랑을 표시하는 방식은 노골적인데 한편 감동적이다. 혀를 대고 사랑하는 대상의 신체를 정성껏 핥는다. 그런데 언어 구사에 능한 인간도 가장 친밀한 사랑을 위해선 결국 입과 몸을 활용한다. 제닌 안토니(…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고, 미술은 공간의 예술이라는 말은 이제 구시대의 통념일 뿐이다. 예컨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사량도 공연은 통영 바다라는 물리적 공간을 예술적 감동의 장소로 기억 속에 각인시킨다. 반면 오늘날의 설치미술, 특히 공공미술은 스펙터클한 공연처럼 단기간 연출되는 경우가 …
요즘은 이삿짐을 쌀 때 박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이상 보따리를 보기 힘들다. 그런데 보따리로 싸는 짐엔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고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 크기와 매듭의 모양, 색깔도 취향마다 제각각이다. 게다가 보따리 짐에서 우리는 종착지도, 목적지도 없는 ‘묻지 마 이사’를 떠올…
거대 자본은 미술 작품의 규모를 키우고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관람자의 완전한 몰입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적 미술작업의 프런티어는 거대한 건축 설치가 이끌며 그 시각적 스펙터클은 압도적이다.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1977년 미국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 …
걷기는 인간의 가장 단순한 행위다. 걸음을 동물적으로 표현한 ‘어슬렁대다’란 말이 있듯, 걸음은 거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돼 왔다. 그런데 이 ‘무위(無爲)의 노동’이 정치적일 수 있을까. 프랑시스 알리스(Francis AlRs)는 2004년 예루살렘 자치구를 걸으며 녹색…
볼거리가 많은 도시를 밤새 자유롭게 누비며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크리스마스이브나 12월 31일의 ‘올 나이트’를 손꼽아 기다린다. 도시의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짜릿함이 분명히 있는 듯하다.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1년에 하루 정도 우리를 제약하는 시간에 구애…
외롭고 힘들 때 가장 반가운 말은 ‘밥 먹자’는 말이다. 맛과 멋을 곁들인 산해진미의 식사는 저리 두고라도 먹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할 때, 이는 생존본능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먹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를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진 관계는 동등하며 끈끈하다. 1990년대 초, 뉴욕의 한…
도시의 밤을 장식하는 건물의 대형 전광판은 소비사회의 상징이다. 구매자의 시선을 1초라도 더 끌기 위한 다양한 광고는 자극적이고 그 전략은 기발하다. 화려한 스펙터클에 이끌린 대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지갑을 연다. 이들의 각축전이 만들어내는 빛의 향연으로 대도시의 밤은 잠들지 못한다…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미묘하다. 불안과 공포는 평범한 일상에서 마주할 때 강도가 더 커진다. 그래서 잘 만든 심리 공포영화는 주로 평온한 가정의 실내 등 평범한 일상생활을 미장센으로 한다. 친숙한 삶 속에 숨겨진 은밀한 공포는 SF영화에서 보는 요란한 공포보다 훨씬 두렵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