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당시 발굴에서 금관보다 더 값진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피장자의 머리맡에 부장된 유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칠기가 드러났다. 기록을 남기고 칠기 조각을 조금씩 들어내자 그 아래 깜짝 놀랄 유물 2점이 숨어있었다. 국보 91호 기마인물형 토기였다. 조사 책임자 우메하라 스에지(…
1973년 4월 8일 일요일. 흐린 봄 날씨에도 고교생 한 명이 유적답사에 나섰다. 그는 경북 경주시 조양동 성덕왕릉 남쪽 능선을 오르다 곳곳에 흩어진 기와 조각들을 확인했다. 그곳이 절터라고 짐작한 순간, 잘 다듬어진 석재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석탑 지붕돌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
2000년 10월 국립경주박물관 정원 내 우물에 사람들이 모여서 진지한 표정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시 그 속에서 홀로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발굴하던 고고학자가 바로 필자였다. 여러 유적을 조사했지만 그때만큼 두렵고 긴장한 적은 없었다. 처음 우물 입구가 발견됐을 …
1965년 6월 22일 일본 수상관저에 한일 고위 당국자들이 모였다. 메인테이블 오른쪽에 이동원 외교장관과 김동조 주일대사가, 왼편에는 시나(椎名) 외상과 다카스기(高杉) 수석이 앉아 25개에 달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수년을 끈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조인식 직후 이 장…
1975년 3월 25일 황남대총 발굴단에서 차출된 정예 조사원들이 경북 경주 안압지(雁鴨池)에 모였다. 때마침 날씨는 맑았고 지난겨울 발굴단을 괴롭혔던 삭풍 대신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다.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곤 한다. 상 위에 돼지머리를 올리고는 발굴이 무사히 끝…
1945년 12월 3일 새벽. 경복궁에 흰 눈이 쌓였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이날 박물관이 개관하면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 부산행 열차표까지 어렵게 구했건만, 미군정은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억류 …
조선 정조 19년(1795년) 3월 판의금부사(종1품) 홍양호(洪良浩)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도성에서 쫓겨났다. 그때 그의 나이 71세. 1년 넘게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기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경주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다 문무왕릉비를 발견했다는 것…
1926년 5월 20일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는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개관을 준비하던 중 다급한 전보를 받았다. 경주에서 신라 고분이 여럿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촉탁직원 고이즈미 아키오를 불러 함께 현장을 찾았다. 이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참…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무덤 속을 조금씩 파내려가던 고고학자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여기쯤 금관이 묻혀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이지?’ 도굴된 흔적이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1975년 6월 30일 오후 경북 경주시 황남대총 발굴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
1927년 11월 10일 야심한 밤. 경주박물관 뒤뜰에서 누군가 어둠을 헤치며 살금살금 금관고(金冠庫)로 다가섰다. 문고리는 열려 있었고 괴한은 미리 리허설이라도 한 듯 아무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순식간에 창고로 들어갔다. 좁은 창문 틈을 타고 들어온 달빛에 금관의 멋진 실루엣이 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