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인생을 바꾼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와 가까운 경험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문학동네)를 읽었을 때였다. 십여 년 전 아직 프로가 아니던 나는 당연한 말이지만 시야가 좁았다. 책은 좋은 충격이었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창작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별생각 없이 첫 책을 쓰고 두 번째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새삼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전문 작가는 어떤 컴퓨터의 무슨 프로그램을 사용하는지, 어디서 쓰면, 몇 시에 작업을 하면 잘되는지…. 돌이켜 보면 유치했지만 당시의 난 진지했다. 글쓰기의 세계에 노하우 같은 게 있다면 빨리…
창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학교에서 창문 너머 텅 빈 운동장을 보곤 했다. 사람이 없는 운동장에는 묘한 서늘함이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그 느낌이 나지 않았다. 창으로 바라본 운동장만이 특별했다. 반지하 집에 살 때도 창을 보았다. 밤과 낮이 바뀌어 시간 개념도 흐릿하던 …
많은 이들이 마녀사냥이 중세에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14세기에서 17세기에 주로 이루어졌고, 15세기부터 급속히 확산됐다. 미몽의 어두움으로 둘러싸인 중세가 아니라 계몽의 광채가 비친 근대에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마녀사냥은 종교개혁이 시작된 가운데 발생했다. 근…
어릴 때 닭 한 마리로 삼계탕을 끓이면 다리 하나는 아버지의 그릇, 다른 하나는 오빠 그릇에 들어갔다. 다리를 좋아했던 나는 “왜 항상 다리는 아빠랑 오빠가 먹어”라고 물었고 가족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빠가 “난 살 많은 몸통이 더 좋다”라고 말한 덕에 난 그때부터 다리를 먹…
문화 연구자로서 내 주된 연구 분야는 자기계발이다. 자기계발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끼치는 위험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책은 모두 이에 대한 비판이거나 대안이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자기계발 서적 추천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좀 당혹스럽지만 그럼에도 그런 요청에 적극적으로…
커다란 사람 앞에 가면 긴장한다. 내 바보 같음을 숨기려고 해도 전부 꿰뚫어보는 것 같고 그렇다고 대놓고 바보처럼 굴 용기도 없어서 행동이 어색해진다. 사자 앞에서 몸이 굳은 작은 초식동물이 된 기분, 살면서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책을 읽다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 20대는 방황으로 가득했다. 참스승을 찾아 온 청춘을 소비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 무림의 고수를 찾아 나서던 것과 비슷하지 싶다. ‘스승 찾아 삼만리’의 여정은 좌절로 귀결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승에 대한 내 기준은 지나치게 높았다. 당시 나는 지덕체가 합일된 완전체의…
남태평양 피지에 간 적이 있다. 본 섬에서 배를 타고 한참을 가면 나오는 작은 섬이었다. 오두막 몇 채, 작은 식당 겸 바가 전부였고 섬의 끝에서 끝까지 1분이면 걸을 수 있었다. 지상낙원이라고 광고를 하기에 ‘그래 어디 한번 낙원에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정한 여행지였다. 게스트하우스…
웃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렇기에 나는 웃긴 책을 각별히 좋아한다. 이번에 소개할 판타지 소설 ‘멋진 징조들(Good Omens)’은 가히 웃음 종결자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엑소시스트’와 쌍벽을 이루는 오컬트 영화인 ‘오멘’의 패러디물.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 소설의 매력을 충분히…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맞다. 피할 수 없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우리는 모두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인간은 작고 연약하게 태어난다. 목도 가누지 못하던 아기가 앉고, 걷고, 뛸 수 있게 된다. 몸도 커진다. 하지만 영원히 성장…
‘고전을 읽으면 성공한다’는 신화가 한국 사회에 번진 지 10년이 넘었다. ‘고전은 천재가 썼다. 고전을 열심히 읽으면 우리도 천재가 된다. 고전 탐독은 성공의 비결이자 엘리트의 자녀 교육법이다.’ 이 주장에 감화받아 한동안 고전 열풍이 불었으나 그 결실은 초라하다. 인문 고전을 10…
한 분야에 능숙해지면 다른 분야도 쉬워진다고 말했던가. 음악과 글은 같은 창작의 범주 안에 있지만 너무 다르다. 그래서 재작년 에세이집을 쓸 당시 나는 큰 혼란을 느꼈다. 이 증상을 고쳐 줄 글을 찾아 헤맸다. 날카롭고도 부드러운 글이 필요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그 와중에 발…
딱히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게으름뱅이다. 아침에는 좀비처럼 허우적대다 저녁에야 활력을 되찾는다. 이를 부끄러이 여기진 않는다. ‘귀차니즘 솔(soul)’과 ‘잉여 스피릿’이야말로 창조의 동력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일요일처럼’(필로소픽)은 이런 이유로 내 눈길을 사로잡…
일본에서 2년간 산 적이 있다. 그때 생긴 이상한 버릇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면 일본어로 혼잣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누가 일본어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답하는 중인 양 벽을 보고 한참을 중얼중얼하면 차분해졌고, 문제의 핵심에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어로 그렇게 하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