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다이어리에 쓴 계획들은 잘 지키고 계신지. 다이어리에 관해서라면 새해가 시작될 무렵에 글을 쓰는 게 적절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미룬 데는 사정이 있었다. 몇 해 전부터인가 다이어리는 K에게 받고 있다. 매번 똑같은 색깔과 디자인을. 그러나 친구라고 해도 일 년에 한 번도 …
라틴아메리카 작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의 책들은 늘 손닿는 데 두고 지낸다. 비인간적인 사회정치 체제의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나 통념처럼 굳어진 부당한 것들을 거부하는 인물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는데,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졌다가도 그 신선함과 상상력에 즐거워지기까지 한다. 단…
봄이 되면 우리 동네 재래시장에 식물을 파는 노점들이 열리고 나는 자주 그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마당도 베란다도 해가 잘 드는 손바닥만 한 장소도 없고 식물을 잘 키우는 재주도 없으면서. 하지만 싱싱한 로즈메리 바질 같은 허브나 다육식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교육방송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그런 일은 해본 적도 없고 재주도 없지만 ‘라디오’라는 말에 마음이 먼저 끌렸다. 게다가 책을 소개하고 낭독해주는 프로라 좋아하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옛날 생각이 난 것도 사실이다. 텔레비전이 없던 유년 시절, 우리 집…
이십대 초반에 나는 이런저런 방황 끝에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새로 생긴 디자인 회사였는데 그 무렵 붐을 타던 컴퓨터그래픽으로 건축 설계나 인테리어 작업, 애니메이션이 필요한 광고 제작을 하던 데였다. 디자인 학원을 다니다 채용된 나는 제작팀에서 도면 작업을 돕기도 했지만 도무지 마…
예민한 데다 겁도 많은 막내 조카는 처음으로 제 방이 생기자 아니나 다를까, 침대 머리맡에 베이지색 곰 인형 먼저 눕혀 놓았다. 혼자 잘 때 무서운데 그 인형을 껴안고 자면 조금 괜찮아진다고. 조카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어느 자리에선가 희고 푹신푹신한 대형 곰 인형이 생겨 두 팔로 껴안…
몇 년 전에 낯선 도시로 가서 살게 되었을 때, 한 에디터가 도시락 통 하나를 선물로 준 적이 있다. 단순한 직사각형 디자인과 옥색 빛깔이 무척이나 세련됐지만, 2단짜리 도시락인데도 밥과 찬을 담기에는 너무 작아 보여서 한참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게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
나는 이 글을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한글만 쓸 수 있는 구식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소설이나 모든 원고 작업도 이 노트북으로만 한다. 사실 이 노트북은 고장 난 지 오래됐지만 글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다. 말하자면 타이핑 기능밖에 안 되는 ‘글 쓰는 사물’인 셈이다. 딱히 이 때문…
지난주부터 개학과 개강이 시작됐다. 개학 전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조카들의 연필, 일기장, 네임펜 같은 학용품들을 챙겨주고 나도 작업실로 돌아와 문구용품을 점검했다. 포스트잇, 녹색 하이테크포인트 펜, 색색의 페이퍼 클립은 한 학기를 보낼 만큼 충분히 갖고 있어야 하니까. 소설창…
한 선배가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모여 각자 준비해온 포도주와 빵을 차려놓고 모임을 가졌다. 그 사무실이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저녁값 술값 부담을 줄여보자는 의도도 있었다. 1년 전 모임 때도 그랬다. 난방을 줄여 놓고 사무실에서 세 사람 다 외투를 껴입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
자주 이용하는 식품전문 쇼핑몰에서 작은 토마토 홀을 주문했는데 착오가 생겼는지 무려 2.5kg짜리가 배송돼 왔다. 그 캔을 들고 조카들에게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어주러 갔다. 올리브 오일에 양파를 볶다가 토마토 홀을 넣으려고 할 때에야 그 캔이 원터치 방식이 아니라 캔 오프너로 가장자…
티눈 비슷한 게 생겨서 피부과에 갔더니 발을 들여다본 의사가 “많이 걸어 다니느냐”고 물었다. 발이 너무 울퉁불퉁하게 생긴 걸까. 아무려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걸어 다니는 건 사실이다. 내가 지나다니는 한적한 도로변에는 유리가게가 하나 있다. 가게 앞까지 크고 작은 유리와 거울…
나는 세 종류의 일간지를 읽는데 그래서 날마다 놀라고 배우고 생각하게 되는 일들이 더 생긴다. 최근에는 일회용 제품들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기사들을 여러 번 보았다. 카페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컵들이 하루 5t 트럭 한 대 분량이나 되고, 종이컵은 안쪽에 폴리에틸렌으로 코…
고아로 자란 엘리는 한 농장의 가정부로 들어갔다가, 가족을 잃고 혼자 살고 있던 집주인과 결혼을 한다. 양과 닭을 키우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달걀을 배달하러 간다. 크게 낙담할 일도 슬픔도 기쁨도 없을 것 같은 날들만 이어진다면 소설은 진행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가 바뀌면 ‘새해 결심’이라고 몇 가지 정도는 일기장이나 다이어리에 적게 된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올해 첫 일기를 들춰보니 ‘일기를 더 자주 쓰고 휴대전화 보는 시간 줄이고, 더 많이 읽고 쓰는 그런 한 해를 만들어야지’라고 써놓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