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삶은 지루하지 않았고 온건한 국수는 밋밋하지 않았다. 올해 가을은 혼동과 함께 찾아왔다. 크고 작은 태풍이 수시로 위협했고 반복되는 경보와 주의보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9월이 다 갔다. 이럴 때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을 마주하며 위로를 받는다. 고기를 구수하게 우려낸 육수, 잇…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해외여행 자유화의 물결에 휩쓸려 대학 3학년이던 1990년 유럽여행을 떠났다. 요즘 유행하는 ‘한 도시에 한 달 살기’는 언감생심 상상도 못 하던 시대다. 가이드를 따라서 파리, 런던, 로마 등의 도시들을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2주에 8개국을 도는 빡빡한 스케…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라면 부러 시간을 내어 먼 길을 마다 않고 돌아다니는 ‘역마살’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생각하니 햇병아리 전공의 시절부터였음이 분명합니다. 수련 기간 몇 년 동안 교수님들은 식도락의 세계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모래내에서 성북동까지 장안의 유명 식당들을 섭렵하며 논문 …
무더운 점심시간에 손님들이 줄을 서 있는 식당에 가게 됐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자리에 앉았는데 나오는 음식은 땀을 더 흘리게 하는 전골이었다. 이때 국물이 끓었다고 불을 끄면 안 된다.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낮은 불에서 은근히 계속 끓이고 있다. 곱이 빠져나와 녹진해진 국물이…
가을이다. 아직 8월이지만 이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전어’ 시즌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올해는 삼천포에서 축제의 서막을 알렸다. 7월 16일 금어기가 풀리자 삼천포에서는 같은 달 28일부터 닷새에 걸쳐 전어 축제를 열었다. 여름 휴가철과 교묘하게 맞아떨어져 폭발적인 인기를 …
어떤 음식을 처음 맛본 기억만큼이나 여러 번 먹어 왔던 음식을 유난히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1987년 11월 어느 날,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치르고 집에 돌아와 저녁으로 먹었던 어머니가 끓여주신 카레라이스는 최고였다. 열아홉 인생 최초로 치르는 큰 시험을 끝냈다는 해방…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제철에 반드시 먹어줘야 할 ‘must eat!’ 리스트를 갖고 있습니다. 약간의 강박증이 있는 저로서는 해당 철이 다 지날 때까지 아직 그 ‘it’을 ‘eat’ 하지 못했을 경우, 그야말로 안절부절 좌불안석이 되곤 하지요. 요즘처럼 무더위가 지속될 때는 …
충북 충주시 인근의 지역사회개발 자문위원이 돼 여러 번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모임을 주관하던 마을회장은 멀리서 오는 위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삼복더위에 영양 보충이 될 수 있는 음식으로 마련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토종닭 백숙을 상상하며 갔는데 개수육이 나왔다. 동…
비 내리고 날이 더우면 하루를 보내는 일이 수월치 않다. 골목길에 가득한 고소함. 막국수 집에서 이번 여름에 내놓은 들기름막국수가 주범이었다. 사장은 매일 아침 들깨로 기름을 짰다. 손님이 주문하면 메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해 국수를 뽑았다. 들기름막국수는 장마철을 맞아 엄청난 잠재력을…
과문한 탓에 노포(老鋪)라는 단어를 어려서부터 들어보진 못했습니다. 한자어라서 그 뜻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음식평론가나 언론이 일본에서 들여와 유행시킨 말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론해 봅니다. 일본에서는 노포를 발음 그대로 ‘로호’라고도 하지만 대개는 ‘시니세’라고 말하지요. 누군가 노…
제2차 세계대전 후 만들어진 최고의 로맨스 무비는 ‘로마의 휴일’이다. 당대 최고의 미녀 오드리 헵번이 상상이 아닌 현실 속의 공주로, 선이 굵은 미남 그레고리 펙이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신문기자로 나왔던 달콤한 스토리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녹여주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여름 농촌활동을 가서 만들었던 요리가 부추겉절이였다. 밭으로 일하러 나가기 전 억센 부추에 멸치액젓을 넣어 섞은 뒤 뚜껑을 덮어뒀다. 몇 시간 지나 돌아와 보니 부추가 여름 더위와 액젓의 소금기를 이기지 못해 숨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약간 풀이 죽은 부추는 너무 억세지도 …
‘수육’이라는 두 글자는 간단치 않다. 말 그대로 물에 끓인 고기에 불과하지만 맛의 뉘앙스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좋은 고기의 선별. 연하면서 쫀득한 육질, 질깃하지 않게 삶기, 공기에 접촉하는 시간 등 복합적인 요소가 수육 한 점으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수육집에…
20여 년 전 신유고연방에서 독립하려는 알바니아인들과 이를 막으려는 세르비아의 충돌이 있었던 코소보 사태 때의 일이다. 미국이 개입을 선언하고 세르비아를 공격하다가 중국대사관을 오폭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에 진출한 맥도널드와 버거킹은 불매운동 피해를 입었는데 피자헛은 말…
경기 수원은 큰 하천도 없고 대형 저수지도 없는 전형적인 물 부족 지역입니다. 그런데 수원(水原·물골)이란 명칭을 신도시 이름으로 확정한 사람은 정조의 하명을 받든 다산 정약용이었답니다.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써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물 부족 때문에 기근에 시달린다면 왕의 체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