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본읍 김좌수가 흥부를 불러 하는 말이 ‘돈 삼십 냥을 줄 것이니 내 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 생각하되, ‘삼십 냥을 받아 열 냥어치 양식 사고 닷 냥어치 반찬 사고 닷 냥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조섭 하리라.’”(‘흥부전’에서) 반년…
“서울의 기생 중에 누가 가장 유명하지? 소아라는 기생이네. 그 ‘조방(助房)’은 누구인가? 최박만이라네.”(박지원의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 18세기 중반 연암 박지원이 지은 ‘광문자전’에는 서울의 다양한 모습이 소개됐다. 당시 성행했던 사채업에 대한 내용도 있고, 검무로 유명…
“흰 밀랍과 푸른 종이로 매화와 대나무를 만들고, 그 사이에 비단을 오려 만든 붉은 복숭아꽃을 두었다.”(이황 ‘퇴계집·退溪集’) 한순간 피었다가 스러지는 꽃을 원하는 대로 장식하고 오래 보기 위해 만드는 것이 조화(造花)다. 요즘은 조화를 하도 잘 만들어 생화와 구분할 수 없을…
“세마(貰馬) 세 필을 내었으니 돈이 얼마나 들었겠니? 노자(路資)와 함께 열 냥이나 들되, 집에 돈이 턱없이 모자라 근이에게 빌렸단다.”(의성 김씨 김성일파 종택의 한글 간찰에서) 학봉 김성일의 11세손인 김진화(1793∼1850)의 부인 여강 이씨(1792∼1862)가 1847…
《조선시대라고 ‘사농(士農)’, 선비와 농민만 살았으랴. 오늘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수많은 ‘공상(工商)’이 살았다. 조선의 진면목은 낮과 궁(宮)뿐 아니라 밤과 저잣거리에도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 젊은 연구자들이 사료의 짧은 기록을 추적해 그들의 세계를 조명한다. 다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