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입니다. 갇힌 성 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몇이서…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서부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심원에서부터, 창세기 이전에서부터 준비되어 왔던 영혼의 방.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가정의 방에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았던 나의 아내여. 그리고 나를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님이라고 부르…
‘각이 진 내가 당신을 닮으려고 노력한 세월의 선물로 나도 이제 보름달이 되었네요 사람들이 모두 다 보름달로 보이는 이 눈부신 기적을 당신께 바칠게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 -이해인 시 ‘보름달에게’ 마른 매무새가 날카롭다 싶었는데 몸이 점점 불어난다. 어느새 둥그…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비록 둘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로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식이 지워져 나가는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안간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는 소리, 그리…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 그루의 나무 같다. (…) 인생은 마치 시 같아. 난해한 것들이 정리되고 기껏 정리하고 나면 또 흐트러진다니까. 그렇지만 아빠, 어제의 꿈을 잃어버린 나무같이 바람을 싫어하지는 않을 거…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 이동’ -신달자 시 ‘그리움’ 사랑이 때 돼서 밥 먹고 세수하는 일상 같다면, 혹은 아무 때나 펼쳤다 덮었다 할 수 있는 책읽기 같다면…. 그러나 사랑은 덤덤한…
“사실은 나무로써 ‘시간박물관’ 같은 거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기념식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좋다.” “백년, 이백년 세월이 흐르면 볼만해지지 않겠어요?” “천년, 이천년 세월이 흐르면 더 볼만해질 테지. 좋다. 시간에 다는 방울 같은 것이다. 나무라는 것이.”…
‘1982년 12월 개장한 삼풍백화점은 지상 5층, 지하 4층의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1995년 6월 29일, 그날, 에어컨디셔너는 작동되지 않았고 실내는 무척 더웠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언제 여름이 되어버린 거지. 5시 40분, 1층 로비를 걸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5시 …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함민복 ‘가을’ 가을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다. 밖에 나가고 싶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마음.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에 몸이 가벼워지니 그럴 법하다. 그리고 손잡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마른 피부에 온기가 느껴지…
‘아빠는 외할머니에게 고등학교 일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래희망을 적어내라. 그래서 아빠는 효자라고 적었다. 그러자 담임이 아빠를 불러내 말했다. 아버지가 장래희망인 놈은 봤어도 효자가 장래희망인 놈은 처음이다. 다시 써와! 아빠는 다시 써가지 않았다. 담임…
그는 악(惡)을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그 진부함이 나를 웃겼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악을 왜 이해하려 하시오?” “알아야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말했다.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 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