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가 7월부터 22회에 걸쳐 연재한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시리즈는...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발발 22개월여 만에 종결됐다. 노량해협에서 대패한 왜군은 부산본영으로 집결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임진년인 1592년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돼 7년간 조선 땅을 유린한 임진·정유 전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1598년 11월 18일 삼경(三更·밤 11시∼새벽 1시), 이순신은 광양만 바다의 대장선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빌었다. “오늘 진실로 죽기로 결심했사오니 하늘은 반드시 왜적을 섬멸시켜 주시기를 원하나이다.”(‘연려실기술’) 이순신은 평소 “나는 적이 물러가는 …
정유재란 발발 이듬해인 1598년 여름, 남해 바다는 폭염과 함께 전쟁 열기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7월 18일 왜군 군선 100여 척이 전남 고흥의 녹도(鹿島·녹동)로 침범해 왔다. 10개월여 전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이후 남해안 곳곳에 축조한 왜성들에 칩거하며 민간인 약탈과 산발…
1, 2일 이틀간 기자는 배를 타고 서남해의 바다를 누볐다. 420년 전 바로 이 무렵, 조선수군 재건을 위해 부단히 움직이던 이순신의 해상 길을 복원해 보는 취재였다. 이순신은 1597년 8월 18일(음력) 남해안의 장흥 회령포(회진항)에서 13척의 배를 수습한 뒤 그 한 달 …
1597년 겨울 ‘호랑이 사냥’이 시작됐다. 임진·정유 7년전쟁 중 가장 잔인한 학살 행위로 조선인들에게 악귀(惡鬼)라고 각인된 ‘호랑이 가토(왜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는 작전이었다. 가토는 임진왜란 중 함경도에서 조선 호랑이 사냥을 즐겼고, 잡은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도…
‘하나-조선 군현(郡縣)에서 지금 이후로는 사민(士民)과 백성 된 자는 각기 향읍(鄕邑)으로 돌아가 오로지 농사에 힘써라. 하나-조선의 상관(上官·관리)들을 곳곳에서 찾아내 잡아 죽여라. 그 처자와 따르는 무리(從類)들도 주살토록 하며, 상관의 집은 불을 질러 태워 없애라. …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면 전남 구례가 나온다. 그 접경을 지나면 바로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전략 요충지가 있다. 섬진강을 가운데 끼고 북으로는 지리산의 험준한 산세가 강변까지 뻗쳐 있고, 남으로는 백운산의 한 봉우리가 치솟아 역시 강변에 접해있다. 양쪽에 큰 산이 대…
“꿈이 예사롭지 않으니 임진년 대첩(한산도해전)할 때와 대략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는 알 수 없었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3일)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
“주사(舟師·전선)가 너무 적어 왜적과 맞설 수 없으니 경은 육전(陸戰)에 의탁하라.” 조선 조정의 선전관 박천봉이 이순신에게 들고 온 선조의 유지(有旨)였다.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군 열선루(列仙樓)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그날 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누대…
“맑음. 이른 아침에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가져왔다. 유지 내용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삼가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진양(진주)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의 사랑채…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
1일 일본 교토(京都) 시 히가시야마(東山) 구의 옛 대불사 터(대불전). 정유재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00m쯤 걸어가다보니 대로변에 경주의 중형급 규모 고분과 비슷한 크기의 무덤 하나가 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