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민족 전체가 한목소리로 외친 3·1만세운동. 이 역사적 함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일까. “100년 전의 3·1운동은 한민족의 강한 정체성, 나아가 민주주의 의식을 국내외에 과…
김규식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가기 전 몽골에서 활동했다. 독립투사들을 양성할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1914년 그의 몽골행에는 세브란스의학교 출신 이태준(사진)도 동행했다. 이태준은 세브란스 재학 시절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자매단체였던 ‘청년학우회’에 …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세계의 이목은 프랑스 파리에 집중됐다. 독일의…
중국 상하이 황피난루(黃陂南路)는 신톈디(新天地)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화려했다. 골목마다 들어선 유럽풍 카페들의 멋들어진 분위기는 상하이가 ‘동양의 파리’로 불리는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그 골목길 한구석에 붉은색과 회색이 교차하는 벽돌 건물이 나타나자 관광객들이 일제히 휴대전화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주요 인사 가운데 도산 안창호(1878∼1938)를 빼놓을 수 없다. 일찌감치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2년 미국에서 유학했던 그는 1909년 발생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연루된 혐의로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미국에서도 독…
“만천하 동지 여러분 앞에 선포, 제의하노니… 해외 각지에 현존한 단체의 대소은현을 막론하고 규합 통일하여 유일무이의 최고 기관을 조직할 것. 대헌을 제정하여 민정에 합한 법치를 실행할 것.” 1917년 2월 중국 상하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에는 민주공화 정부의 정신이 담겨 …
1920년 4월 4일 밤, 연해주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이 기습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 한인 거주 지역을 습격해 가옥 등을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다수의 한인을 살상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이 2, 3일에 걸쳐 광란의 살상극을 부른 ‘4월 참변’이다. 노인동맹…
1919년 3월 26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마을 신한촌에 자리한 한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최대 항만도시이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 도시’로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이곳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해삼위(海蔘외)라 불리며 두만강을 건너간 많은 한국인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곳이다. 가장 왕성하고도 치열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차를 타고 2시간 30분가량 북쪽으로 가면 윌로스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이곳에 가면 비행학교로 사용됐던 낡은 건물이 있다. 100년 전 한국 최초의 한인비행학교와 훈련소로 사용된 곳이다. ‘노백린 군단’으로 불렸던 이 학교의 정식 이름은 ‘비행가양성소…
‘미일전쟁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일대 기회로다. 미일전쟁이 되면 일본의 세력이 한국과 만주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일본이) 전제정치를 쓰는 러시아는 이겼으나 8000만 인구가 다 병정인 미국을 어찌 당하리오.’ 미국 한인단체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는 1907년 9월 6일자 사…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를 맡기 전까지 미주 한인사회를 이끈 도산 안창호(1878∼1938·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의 흔적은 미 서부 곳곳에 남아 있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우체국이 ‘도산 안창호 우체국’으로 명명됐고 그의 이름을 붙인 나들목과 광장도 …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중심지 유니언스퀘어에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걷다 보면 오래된 시계탑이 눈에 띈다.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종탑을 모델로 1898년에 세워진 이 탑은 높이가 71m에 이른다. 시계탑이 돋보이는 페리빌딩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로 통한다…
1919년 4월 2일 전남 순천군(현 순천시) 낙안면 신기리 뒷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8명의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해 같은 월 같은 날에 죽자”고 약속한 뒤 ‘도란사(桃蘭社)’라는 결사체를 조직한다. ‘도란’은 중국 한나라 때 유비·관우·장비 3…
경남 의령 출신인 백산(白山) 안희제(1885∼1943·건국훈장 독립장)는 백범(白凡) 김구, 백야(白冶) 김좌진과 더불어 삼백(三白)으로 불렸던 독립운동가다. 당초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던 그는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한다.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