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가평의 서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훈장 이규봉(1873∼1961)은 모처럼 한양(경성)을 찾았다. 1919년 3월 3일 거행되는 고종의 인산(因山·왕족의 장례)을 참관하기 위해 미리 상경한 참이다. 인산일을 하루 앞둔 경성 거리는 이미 흰 베로 싸개 한 갓과 흰 신발을 신은 이들…
1919년 3월 초 경성의 마포와 서해안 지역을 배편으로 이어주는 한강 양화진나루(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성지 공원 일대)는 크고 작은 배와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선창에서 정박 중이던 기선(汽船)이 이윽고 출항을 알리는 소리를 내자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간을 거슬러 99년 전인 1919년 10월 초, 추석을 며칠 앞둔 경성(서울) 서대문감옥의 여옥사 8호 감방은 벌써 한겨울로 접어들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바닥은 빙판처럼 차가웠고 몸은 오슬오슬 떨렸다. 일여덟 명의 독립만세운동 ‘여전사’는 감방에서 추위를 이기려 온몸을 웅크리고 앉…
고향은 경성(서울), 1897년생, 본명은 순이(順伊), 10대 나이에 ‘향기로운 꽃’이란 이름으로 기적(妓籍)에 오른 수원 기생 김향화(金香花).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운치를 더하고, 맵시 동동한 중등 키에, 성품은 순하고 귀염성이 있다. 검무·승무·정재무·가사·시조·경성잡가·서관…
《토요기획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기획은 3월 이후 14차례에 걸쳐 발생 배경, 각계각층의 움직임, 국내외 대응 등을 거시적 관점에서 조명했다. 15화부터는 국내외 각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현장을 찾는다. 당시 어떻게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됐는지 독립운동가 유가족 및 …
1919년 6월 초,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가 경성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서대문 밖 모화관(독립문의 옛 이름) 막바지 산등성이의 붉은색 벽돌집을 찾아갔다. 인왕산 자락 아래 두 길 남짓한 담장이 육중하게 둘러싸고 있는 서대문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기자는 간수…
1919년 3월 9일 경성 상인들이 일제히 상점 문을 닫아걸었다. 경성상민(京城商民) 대표자들이 작성한 ‘경성시 상민일동 공약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공약서는 △9일 일체 폐점할 것 △시위에 가담할 것, 단 폭행은 하지 말 것 △위약한 상점은 용서 없이 처분(응징)할 것 등…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경, 경성 남대문역(서울역) 앞 광장. 이틀 전 고종의 국장(國葬) 행사를 참관한 뒤 귀향하는 사람들로 역 앞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렸다.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계 외엔 광장을 오가는 행인들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다. 그러나 3·1…
“모든 성공적인 혁명은 썩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부패한 사회체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진다는 의미다. 미국 경제학자 갤브레이스(1908∼2006)가 내건 성공적 혁명의 조건으로 보면 3·1운동은 무모한 행동이자 실패로 가는 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만세운동이 기습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당황했다. 일경(日警)은 군중의 열광적인 만세 함성에 기가 눌렸다. 1910년 한반도를 강제 병탄한 이후 경성(서울)에서 처음 겪는 대규모 거리 시위였다. 일경은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거리 좌우에서 우두커니 서…
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그날이 밝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청명했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먼 길’을 떠나는 채비를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하루 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1919년 3·1운동 거사 이틀 전인 2월 27일 밤, 보성학교 교내에 자리 잡은 인쇄소 보성사(현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 30평 남짓한 규모의 푸른색 벽돌 2층 건물 안은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졌다. 비밀 항일결사체인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 요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천도…
1919년 2월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날, 경성 서촌(西村) 이완용의 집(종로구 옥인동). 쉰여덟 살의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1861∼1922)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세상에서 당신을 매국적이라고 하는데 흥국대신(興國大臣) 한번 될 생각은 없소?”(언론인 유광렬이 한국…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수목이 울창한 삼청동 산비탈에 자리 잡은 2층 규모 붉은 벽돌집 학교는 장안의 명물로 부상했다. 1917년 11월 오로지 민족 자본만으로, 그리고 선생과 학생들이 직접 터를 닦고 돌을 나르는 등 한민족의 열정과 땀으로 완공한 새 교사(校舍)였…
1918년 11월 20일 국내 비밀 항일결사체인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이끄는 이종일(1858∼1925)의 마음은 착잡했다. 단원으로부터 “(만주의) 중광단원(重光團圓) 39명이 우리보다 앞서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 한다”는 첩보를 듣고 나서였다. 육척장구(六尺長軀)의 이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