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눈 속을 노닐며, 자주 매화 꽂고 그 향기에 취했었는데.매화 꽃잎 손으로 산산이 부수는 심란한 마음, 옷깃에는 말간 눈물만 그득.올핸 바다와 하늘의 끝자락에서 성긴 귀밑머리 두 가닥이 어느새 희끗희끗.저물녘 몰아치는 바람세 보아하니, 분명 매화 구경은 어그러질 것만 같아.(年年…
뜰 안 오래된 오동나무 한 그루,우뚝한 줄기는 구름까지 닿을 듯.가지는 남북에서 날아드는 새들을 맞고,잎사귀는 오가는 바람을 배웅하네.(庭除一古桐, 聳幹入雲中.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우물가 오동나무(정오음·井梧吟)’ 설도(薛濤·768∼832)이 소박한 풍경화 속에는 억울한 사연…
뜰 앞 하얀 눈이 사라진 건, 세찬 바닷바람에 날려갔기 때문.높은 하늘에서 분명 제 짝을 얻은 듯, 사흘 밤을 둥지로 돌아오질 않네.푸른 하늘 구름 너머로 사라진 울음소리, 밝은 달 속으로 가라앉은 그림자.내 관사에서 이후로는, 그 누가 이 백발노인의 벗이 되려나.(失為庭前雪, 飛因海…
파리떼 피를 놓고 겨루니 가증스럽고, 개미떼 구멍을 다투니 추악하구나.급류에서 용퇴하면 그 자가 바로 영웅호걸, 시류 좇아 옹색하게 살지는 않지.놀랍다! 오의(烏衣) 거리에서 왕씨, 사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무섭구나! 청산 이쪽저쪽이 오(吳)와 월(越)로 갈라지다니.지겨워라! …
아침 일찍 방에서 일어나니, 누군가 알려온 눈 내린다는 전갈.문발 한껏 올리고 서설(瑞雪)을 구경하는데, 멀리 정원 계단에 어른대는 새하얀 빛.휘날리는 그 기세는 화로에서 피어나는 연기, 새하얀 풀에는 차갑게 매달린 옥패(玉佩).분명 이건 신선이 잔뜩 술에 취해서, 마구마구 흰구름을 …
찬 바람 하늘 끝에서 이는 이즈음, 그대 심사는 어떠하신지.기러기가 전할 소식은 언제쯤 오려나. 강호엔 가을 물이 잔뜩 불었을 텐데.문장가는 운수대통하는 걸 싫어하고, 도깨비는 사람의 실수를 좋아한다지요.그대 분명 굴원(屈原)의 원혼과 얘기 나누며, 멱라수(汩羅水)에 시를 던져 바치겠…
한 달 한 달은 어슷비슷해도, 한 해 한 해는 다르다네.이른 아침 낡은 거울 들여다보니, 객지살이에 얼굴은 쇠약한 노인 꼴.느긋하게 살아가기란 정말 어렵고, 나와 관련된 일 대부분은 허망하기만.덧없는 인생 얼마나 살랴. 한바탕 봄바람에 취해나 보세.(一月月相似, 一年年不同. 淸晨窺古鏡…
서역인이 부는 옥피리 소리, 그중 절반은 중원 땅 가락일세.시월 남녘 산속의 새벽, 경정산(敬亭山)에 흐르는 ‘매화락’ 가락.근심스레 ‘출새곡(出塞曲)’ 듣노라니, 쫓겨난 신하의 갓끈에는 눈물이 가득.장안으로 가는 길 되돌아보며, 부질없이 품어보는 임금 향한 마음.(胡人吹玉笛, 一半是…
달빛, 강 건너고 누각 지나노니 닿는 곳마다 환한 세상.사람과 계수나무를 품은 채 아득히 멀리서도 맑은 기운 그득하지.갓 돋아오를 때나 이지러질 즈음이면 공연히 슬퍼들 하지만,둥글 때라고 꼭 우리에게 정감을 갖는 건 아니라네.(過水穿樓觸處明, 藏人帶樹遠含淸. 初生欲缺虛惆愴, 未必圓時即…
현자에게 양보하며 재상 자리 막 물러나, 청주를 즐기며 술잔을 기울이노라.묻노니 내 집 찾아오던 손님들이여, 오늘은 몇 사람이나 오셨는가.(避賢初罷相, 樂聖且銜杯. 爲問門前客, 今朝幾個來.)―‘좌승상직에서 물러난 후(파상작·罷相作)’ 이적지(李適之·694∼747)재상직을 내려놓고 음주…
평지든 산봉우리든 가릴 것 없이, 세상에 좋은 풍광은 다 점령되었구나.온갖 꽃에서 따다가 꿀을 만들었지만, 누굴 위한 고생이며 누굴 위한 달콤함인가.(不論平地與山尖, 無限風光盡被占. 采得百花成蜜後, 爲誰辛苦爲誰甛.)―‘벌(봉·蜂)’나은(羅隱·833∼909)온 산야를 헤집고 다니며 꿀을…
봄엔 비가 오지 않아 보리가 죽고, 가을 이른 서리에 벼가 망가졌네.세밑인데 먹을거리가 없어, 밭에서 지황(地黃)을 캔다.그걸 캐서 무엇에 쓰나. 들고 가서 마른 양식과 맞바꾸지.이른 새벽 호미 메고 나섰지만, 어스름한 저녁에도 광주리가 차질 않네.붉은 대문 부잣집에 들고 가, 얼굴 …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고 말하지만, 내 그리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리.바닷물은 그래도 끝이라도 있지, 이 그리움은 아득히 끝이 없는 걸.거문고 들고 높은 누각 오르니, 텅 빈 누각엔 달빛만 가득하다.그리움의 노래를 거문고로 타노라니, 현줄이며 애간장이 일시에 끊어지네.(人道海水深, …
한겨울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정월 또 수도를 떠나야 하는구려.나도 세상 티끌 잔뜩 묻은 내 눈이 원망스럽소. 매양 먼 외지의 꽃만 봤으니 말이오.내 수레의 푸른 휘장은 여전히 번쩍이거늘, 꽃처럼 젊은 그대 탄식일랑 하지 마오.구름처럼 떠도는 남편에게 시집왔으니, 나를 따른다면 그곳이 …
티끌 없이 맑은 밤, 휘영청한 은빛 달빛, 이럴 때 술은 가득 채워야 제맛.하찮은 명성과 이익, 부질없이 골머리만 앓았지.틈서리를 지나가는 빠른 말처럼, 부싯돌 불꽃처럼, 꿈속의 나 자신처럼 짧디짧은 인생이 한스럽구나.가슴속에 품은 뜻, 그 누구와 터놓고 나누랴. 느긋한 마음으로,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