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위로 날마다 쏟아지는 비, 옛 초나라 땅에 찾아든 소슬한 가을.거센 바람에 나뭇잎 지는데, 밤늦도록 담비 갖옷을 움켜잡고 있다.공훈 세울 생각에 자주 거울 들여다보고, 진퇴를 고심하며 홀로 누각에 몸 기댄다.위태로운 시국이라 임금께 보은하고픈 마음, 쇠약하고 병들어도 그만둘 수 없…
붓으로 막 그림을 그리려다, 먼저 차가운 거울을 집어 듭니다. 놀랍게도 얼굴은 부석부석하고, 귀밑머리는 점차 성기는 것 같네요. 흐르는 눈물이야 그리기 쉽지만, 시름겨운 마음은 표현하기 어렵네요. 행여라도 낭군께서 절 깡그리 잊으셨다면, 이따금 이 그림을 펼쳐 보셔요.(欲下丹靑筆, …
옥돌 계단을 적시는 이슬, 밤이 깊자 비단 버선으로 스며든다. 방으로 돌아와 수정 발 드리우지만, 가을달은 여전히 영롱하게 빛나네. (玉階生白露, 夜久侵羅襪. 却下水晶簾, 玲瓏望秋月.) ―‘옥돌 계단에서의 원망(옥계원·玉階怨)’ 이백(李白·701∼762)
그대 생각 간절한 이 가을밤, 찬 날씨에 산책하며 시 읊어보네. 빈산에 솔방울이 떨어질 이즈음, 은거하는 그대 역시 잠 못 이루시리. (懷君屬秋夜, 散步詠凉天. 山空松子落, 幽人應未眠.) ―‘가을밤 친구 구단(邱丹)에게 보내다(추야기구원외·秋夜寄邱員外)’ 위응물(韋應物·약 737∼79…
오동잎 뜰 가득 떨어져 을씨년스럽고, 붉은 대문 굳게 닫힌 고사장은 깊기도 해라.지난날 고뇌하며 시험을 치렀던 이곳, 오늘도 그 초심을 저버리지 않으리.(梧桐葉落滿庭陰, 鎖閉朱門試院深. 曾是昔年辛苦地, 不將今日負初心.)―‘과거 시험장에서(공원제·貢院題)’ 위부(魏扶·약 785∼850)
세상에선 허투루 사람을 사귀기도 하지만, 이 어르신은 전혀 딴판이지.흥 나서 글씨 쓰면 성인의 경지요, 취한 후 뱉는 말은 거칠 게 없지.백발이 되도록 늘 한가롭게 지내기에 그저 푸른 구름만이 눈앞에 있었지.침상 머리맡엔 언제나 술병이 하나, 얼마나 더 이분을 취해 잠들게 할는지.(世…
채찍 떨군 채 말에게 길 맡겼는데, 몇 리를 가도록 닭 울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비몽사몽 숲길을 지나다가 날아온 낙엽에 화들짝 놀라 깨니서리 엉기는 때 저 멀리 홀로 나는 학, 희뿌옇게 새벽달이 걸린 먼 산.아이야, 길 험하다 불평하지 마라. 시절도 태평하고 길 또한 평탄하거늘.(垂鞭…
장안 거리 붉은 먼지 얼굴을 스치는데, 모두들 꽃구경 다녀온다고 떠들어대네.현도관의 많고 많은 복숭아나무, 이 모두가 내 귀양 간 다음에 심은 것들이지.(紫陌紅塵拂面來, 無人不道看花回. 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꽃구경하고 돌아오는 군자들에게 장난삼아 보내다(희증간화제군자·戱…
무쇠 같은 얼굴, 푸른 수염, 번뜩이는 눈매. 세상 아이들이 이걸 본다면 질겁할 테지.이 몸 나라에 바쳐 오랑캐 평정하리라 맘먹었거늘, 때를 못 만났으니 물러나 농사나 지어야 하리.문장 좋아한다고 할 정도는 못 되어도 붓과 먹을 가까이했고, 스스로 병 많음을 탄식해도 마음만은 더없이 …
사람들 모두가 강남이 좋다 하니, 나그네는 당연히 강남에서 늙어야 하리.봄 강물은 하늘보다 푸른데, 꽃배 안에서 빗소리 들으며 잠이 든다.술청 곁엔 달처럼 어여쁜 여인, 눈서리가 엉긴 듯 희디흰 팔. 늙기 전엔 고향에 가지 말지니, 고향 가면 분명 애간장이 다 녹을 터.(人人盡說江南好…
막걸리 갓 익을 즈음 산으로 돌아오니, 가을이라 기장 먹은 닭 오동통 살이 올랐네.시동(侍童) 불러 닭 삶고 술 마시는데, 아이들은 희희낙락 내 옷자락에 매달린다.스스로 위안 얻으려 목청껏 노래하고 술에 취해, 더덩실 춤을 추며 낙조와 빛을 겨룬다.천자께 내 뜻을 펼치는 게 분명 늦긴…
관직 여러 번 옮기는 것보다 과거 급제가 훨씬 낫지. 황금빛 도금한 안장에 올라 장안을 나섰네. 말머리가 이제 곧 양주(揚州) 성곽으로 진입하겠거니, 두 눈 씻고 날 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게.(及第全勝十改官, 金鞍鍍了出長安, 馬頭漸入揚州郭, 爲報時人洗眼看.) ―‘급제 후 광릉 친구…
저녁나절 부슬부슬 비 내리는 강마을. 밤 되자 찾아온 도적들이 날 알아보네.앞으로는 이름 숨기고 살 필요 없겠군. 지금 세상 절반이 그대들과 같겠거늘.(暮雨瀟瀟江上村, 綠林豪客夜知聞. 他時不用逃名姓, 世上如今半是君.)―‘정란사에서 묵다 밤손님을 만나다(정란사숙우야객·井欄砂宿遇夜客)’ …
그대의 시집 들고 등불 앞에서 읽었소. 시 다 읽자 가물대는 등불, 아직은 어두운 새벽.눈이 아파 등불 끄고 어둠 속에 앉았는데, 역풍에 인 파도가 뱃전 때리는 소리.(把君詩卷燈前讀, 詩盡燈殘天未明. 眼痛滅燈猶闇坐, 逆風吹浪打船聲.) ―‘배 안에서 원진(元유)의 시를 읽다(주중독원구시…
조정에서 나오면 날마다 봄옷 저당 잡히고, 매일 강가로 나가 잔뜩 취해 돌아온다.가는 곳마다 으레 술빚이 깔리는 건, 인생 일흔 살기가 예부터 드물어서지.꽃밭 속 오가는 호랑나비 다문다문 보이고, 물 위 스치며 잠자리들 느릿느릿 난다.봄날의 풍광이여, 나와 함께 흐르자꾸나. 잠시나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