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남편이 있다는 걸 아시면서도 / 그댄 고운 구슬 한 쌍을 선물하셨지요. 애틋한 그대의 사랑에 감동하여 / 그걸 붉은 비단 저고리에 달았지요. 높다란 저의 집엔 정원이 딸려 있고 / 남편은 대궐에서 황제를 모신답니다. / 그대 마음 일월처럼 순수한 줄 알지만 남편과 생사를 함께하자…
드라마 속 판관 포청천(包靑天)으로 더 유명한 포증은 송대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시는 자기 다짐이자 일장 훈시 같은 메시지를 담았으니 시적 운치에 앞서 근엄한 경고문처럼 읽힌다. 삶의 도리나 지혜를 유독 강조했던 송시 특유의 설교식 논조가 맨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백발은 양쪽 귀밑머리를 덮었고 피부도 이젠 까칠해졌다. / 아들 다섯을 두었지만 하나같이 종이와 붓을 싫어한다. / 서(舒)는 벌써 열여섯, 게으르기 짝이 없고 선(宣)은 곧 열다섯, 도무지 글공부를 싫어하며 / 옹(雍)과 단(端)은 열셋이지만 여섯과 일곱조차 분간 못하고 통(通)은 …
빈산에 비 막 그치고, 저녁 되자 날씨는 가을 기운/밝은 달은 솔 사이로 비치고/맑은 물은 바위 위를 흐른다./대숲 시끌시끌 빨래하던 여인들 돌아가고/연잎 흔들흔들 고기잡이배들이 내려간다./제멋대로 봄꽃은 지고 없지만, 왕손처럼 느긋하게 이곳에 머무르리. (空山新雨後, 天氣晩來秋. 明…
지난날 아등바등 살았던 걸 자랑할 건 없고 이제야 자유분방한 심사, 거칠 게 하나 없네. 의기양양 봄바람 속을 말 타고 내달리며 하루 새에 장안의 꽃을 다 돌아본다네. (昔日齷齪不足誇, 今朝放蕩思無涯. 春風得意馬蹄疾, 一日看盡長安花.) ―‘급제 후(登科後·등과후)’(맹교·孟郊·751∼…
남들은 자식이 총명하길 바라지만 나 자신은 총명한 탓에 일생을 그르쳤나니.아이가 어리석고 아둔하다 해도 그저 탈 없고 걱정 없이 공경대부에 올랐으면. (人皆養子望聰明, 我被聰明誤一生. 惟願孩兒愚且魯, 無災無難到公卿.) ―‘아들 잔칫날에 장난삼아 짓다(洗兒戱作·세아희작)’(소식·蘇軾·1…
갓 잘라낸 제(齊) 지방의 흰 비단, 눈서리처럼 희고 고왔지요. 마름질로 합환 문양 부채를 만드니 둥그러니 명월과 같았지요. 그대 품속이나 소매를 들락이면서 살랑살랑 미풍을 일으켰지요. 가을 닥쳐와 찬바람이 무더위를 앗아갈까 마냥 불안했는데 상자 속으로 부채가 버려지면서 임의 사랑도 …
신방엔 어젯밤 촛불 붉게 타올랐고 새벽이면 안방으로 시부모께 인사갈 참. 화장 마치고 나직이 신랑에게 묻는 말, “제가 그린 눈썹 색깔이 유행에 맞을까요”. (洞房昨夜停紅燭, 待曉堂前拜舅姑, 粧罷低聲問夫壻, 畵眉深淺入時無.)―‘신부의 심정으로 장수부에게 드린다(閨意獻張水部·규의헌장수부…
신령한 거북이 장수한대도/언젠가는 죽을 날 있고 전설의 뱀이 안개 타고 올라도/결국엔 흙먼지 되리. 늙은 천리마가 마구간에 엎드려 있어도/마음만은 천리를 내달리듯 열사는 말년이 되어도/그 웅지가 사라지지 않는 법. 목숨이 길고 짧은 건/하늘에만 달린 게 아닐지니 심신의 평온을 기른다면…
저녁 무렵 마음 울적하여 수레 몰아 옛 언덕에 오른다. 석양은 저리도 아름답건만 아쉽게도 황혼이 다가오누나.(向晩意不適, 驅車登古原. 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낙유원에 올라(登樂遊原·등낙유원)’(이상은·李商隱·812∼858) 만당(晩唐) 이상은의 시는 난해하고 생경한 어휘, 모호…
식사 마치고 낮잠 한숨, 깨어나선 차 두 사발. 고개 들어 해를 보니 어느새 서남쪽으로 기울었다.즐겁게 사는 이는 짧은 해가 아쉽고, 근심 많은 이는 더딘 세월이 싫겠지만 근심도 즐거움도 없는 나, 길든 짧든 삶에 맡겨버리지. (食罷一覺睡, 起來兩구茶. 擧頭看日影, 已復西南斜. 樂人惜…
사람 사는 마을에 수레나 말 따위의 소음이 없을 리 없다. 한데 세상 명리를 잊으니 시정(市井)의 거처조차 저절로 외진 세계가 된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조차 멀어진다지만 시인은 육신의 행방과 무관하게 마냥 한갓지기만 하다. 심리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경계를 거리낌 없이 통섭하는 도가…
나 범지가 버선을 뒤집어 신으니/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 말하네. 그대들 눈에는 거슬릴지언정/내 발을 다치게는 할 수 없다네. (梵志飜着襪, 人皆道是錯, 乍可刺니眼, 不可隱我脚.) ― ‘버선을 뒤집어 신다(飜着襪·번착말)’(왕범지·王梵志·약 590∼660)허울뿐일지라도 관습에 순응하는…
바다 위에 떠오른 밝은 저 달을 아득히 멀리서도 같이 보리니. 내 님도 긴긴 밤을 원망하면서 밤새도록 그리움에 잠 못 이루리. 촛불 끄니 그 더욱 눈부신 달빛 어느새 옷에도 촉촉이 젖는 이슬. 달빛 두 손 가득 못 드릴 바엔 꿈에서나 만나랴 잠들어 보리. (海上生明月 天涯共此時 情人怨…
문 앞의 흙을 다 구웠어도, 제 지붕엔 기와 한 조각 못 얹었네. 열 손가락 진흙 한 번 묻히지 않고도, 빼곡하니 기와 얹은 고대광실에 사는구나. (陶盡門前土, 屋上無瓦片. 十指不霑泥, 鱗鱗居大廈.)―‘기와장이(陶者·도자)’(매요신·梅堯臣·1002∼1060) 농부, 어부, 직부(織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