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아파트는 기역자로 된 복도식이었다. 네발자전거를 타고 복도를 서성이다 보면 잠겨 있지도 않던 문들이 어디서고 열리곤 했다. 그럴 때면 자전거 바퀴를 재빨리 굴려, 어디 가세요? 누구 있어요? 하며 빼꼼 열린 문을 기웃거렸다. 인기척이 들려 기역자로 꺾인 벽에 살금살금 걸…
돌아보니 이상한 일은 종종 있었다. 나는 세월호 소식을 군대에서 접했다. 만성 기흉(氣胸) 덕에 입대 전 신검에서 3급을 받고, 논산훈련소 입소 후 의무대에서 재검을 기다리다 배가 뒤집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말에 종교 활동을 갔다가 세월호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
6년 동안 자주 오가던 단골 카페가 있었다. 단골이 된 이유는 간단했다. 집과 가까웠고 커피 맛이 좋았으며 거의 매일 오는 나에게 무심한 카페 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 주인은 한 번도 내게 또 오셨느냐 반갑게 인사한 적이 없다. 그저 나를 아는 눈빛으로 ‘어서 오세요’ 나지막이 …
책을 읽다 보면 종종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성격상 책장 모서리를 접지는 못하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여 놓곤 한다. 이마저도 그 용도를 다하면 곧장 뜯어내야 직성이 풀린다. 어느샌가 책갈피로 쓸 만한 것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엽서나 티켓, 사진, 심지어는 카…
어릴 적 가족들과 해수욕장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파도타기에 신이 나 놀 때는 몰랐지만 해변으로 나오고 나면 바닷물을 엄청 먹은 탓인지 입안은 불쾌한 짠맛으로 매스껍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도대체 바닷물은 왜 짤까’라는 궁금증이 생겨 동화책이란 동화책은 다 뒤져본 것 같다. …
얼마 전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일정이 변경되는 일이 종종 있어서 연필을 사용하는 게 간편했다. 연필을 쓰다 보니 자연히 연필깎이를 찾게 됐다. 네모난 검색창에 ‘연필깎이’를 입력하고 여러 제품을 살폈다. 유독 눈이 간 건 독일제 황동 연필깎이였다. 독일에서(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등단을 하고 나서 글쓰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당선작이 발표된 후 인터넷 공간 여기저기에 들락거리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독자들이 내 작품을 좋게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더 이상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사람에게 인정…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한 이래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나온다. ‘저녁이 있는 삶’ 때문에 가뜩이나 직장 회식도 줄어든 요즘, 가정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은 사람들은 다 어떻게 지낼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할까? 대구에서 유튜브에 올릴 생각으로 감염병 …
나는 종종 타인의 손을 읽는다. 습관을 따라 굽은 관절들과 바짝 짧게 깎은 손톱,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흉터나 점 같은 것들을 무심결에 관찰한다. 특별한 의도 없이도 보게 되고 읽게 된다. 어디에서든 맥락을 찾고 서사를 구축하려는 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시선에 닿는 모든 것을 읽…
따지고 보면 영화관을 가는 일은 외롭고 자폐적인 일이다. 영화관에 앉는 경험은 한 영화전문 기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혼자 있는데도 더 혼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에 심취하는 일이다.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면이 벽으로 막힌 공간에 틈입하는 빛을 튕겨내는 하얀 벽을 보러…
어린 시절 즐겨 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꾸러기 수비대’라는 만화가 있었다. 아름다운 이야기의 세계를 지키는 십이 간지(干支) 동물들 이야기였다. 열두 동물 중 나는 가장 똘똘하고 용기 있는 주인공 쥐 ‘똘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늘 마음이 쓰이는 건 돼지 ‘찡찡이’였다. …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고 나서 가장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이 있다. 극장에 가서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다. 아주 망한 영화가 아니고서야 영화는 기록에 남으니까, 그리고 어떤 작품은 영화 채널에서 여러 번 틀어주기도 하니까, 그렇게 그날을 오래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당…
아버지는 올해 결혼 30주년을 맞으셨다. 아버지의 주사(酒邪)는 말이 길어지는 것인데, 문제는 매번 같은 얘기란 것이다. 고로 어머니는 같은 얘기를 30년째 듣고 계시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신혼 초부터 퇴사를 꿈꿨다고 한다. 술에 취하면 당장 다음 날 사직서를 낼 것처럼 …
어릴 적 식탐이 많던 나는 음식물을 보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들어 배가 터지도록 먹고는 했나 보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는 나를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얘야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하시며 우려하는 눈으로 내 등을 두드려 주시고는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탈이 났…
이 일과 저 일의 우선순위가 명백한데도 마음이 빙빙 돌 때. 곤경이 들어설 때 나는 종종 배구 경기를 보러 간다. 경기장에 들어서면 카메라가 미처 담지 못하는 다채로운 장면이 쏟아진다. 경기 전, 몸을 풀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선수단. 코트 밖에서 애타게 경기를 지켜보는 비(非)주전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