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부터 학술 연구를 신문 지면 위로 끌어냈다. 학예면이 그대로 학술 활동의 무대가 됐다. 이는 아카데미아의 영역이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민족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국학’이라는 학문적 전통이 확…
동아일보는 식민 지배 논리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위해 그 출발에서부터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현하는 데에 앞장섰다. 단군(檀君)과 백두산은 동아일보가 한국 민족의 기원과 그 역사의 유구함을 시공간적으로 드러낸 위대한 민족 표상이었다. 동아일보는 지면에 반복적으로 단군 이야기를 실었…
동아일보는 일제 강점이라는 고통스러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는 데 늘 앞장섰다. 일제는 강압적 식민지 문화정책을 통해 우리말과 글에 대한 교육을 제한했다. 일본어를 ‘국어’라는 과목으로 소학교에서부터 전면적으로 가르쳤으며 우리말 교육은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
문화주의를 내건 동아일보는 창간부터 문학을 위한 지면 제작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또 역량 있는 신인 발굴을 위한 문학작품 현상공모를 실시해 한국 문학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특히 신춘문예는 신문사의 꾸준한 지원과 운영의 엄격성 및 공정성을 유지함으로써 한국 문학의 대표적 제도로 정착했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역사소설의 본격적 등장은 동아일보를 통해 이뤄졌다. 역사소설은 시간적으로 과거에 해당하는 역사적 무대를 서사적 기반으로 한다. 현재의 고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가의식을 일정 부분 반영한다. 식민지 상황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
동아일보 창간 작업에는 당대의 문사들이 여럿 참여했지만 염상섭(1897∼1963)이 신임 기자였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신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인물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떠돌이 노동자를 자처했던 그를 동아일보는 왜 창간 때 끌어들였을까? 염상섭은 일본 게이오(慶應)대에…
《1920년 4월 1일 창간 이후 동아일보의 100년은 억눌려 있던 반만년 문화 민족이 다시금 문화의 꽃을 피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미국의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대표적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가 문학을 주요 테마로 ‘문화주의 100년’의 족적과 의미를 짚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