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스나다 마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2011년)에서 말기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엔딩 노트를 작성한다. 조선시대 조영순(趙榮順·1725∼1775)도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시를 읊었다. 시인은 공주의 객사에서 세상을 뜨기 전날…
1889년 토리노에서 니체가 마부의 채찍질에도 요지부동인 말을 껴안고 통곡했다면, 758년 두보는 화주(華州)에서 관군이 길에 버린 야윈 말을 보고 이렇게 슬퍼했다. 이 무렵 시인은 화주로 좌천되었다. 숙종은 안록산의 반란이 진정되자 아버지 현종의 옛 신하들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2005년)는 광대 장생과 공길이 양반집에서 줄타기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광대의 연희를 천시하던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양반집에서 광대놀음을 즐기는 경우가 있다. 송만재(宋晩載·1783∼1851)의 시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땅재주 공연 장…
광대들의 공연을 보고 쓴 한시를 연희시(演戲詩)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 신위(申緯·1769∼1845)는 연희를 보고 다음 시를 남겼다. 전체 12수로 이루어진 이 연작시엔 당대의 유명 광대들이 공연한 각종 연희가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특히 ‘춘향가’를 부르는 창자의 모습과 인…
중국 풍습에 아이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 사람들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며 아이의 몸을 씻기는 것을 ‘세아(洗兒)’라고 한다. 송나라 소식(蘇軾)도 늦둥이 아들의 목욕 모임을 기념하여 다음 시를 썼다. 아이가 총명하길 바라는 것은 부모의 인지상정이지만 시인은 반대로 어리석길 바랐…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2021년)는 신유박해(1801년) 때 정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가 각기 배교와 순교를 선택했던 일로 시작된다. 정약용은 이보다 앞서 조선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이었던 이벽(李檗·1754∼1786)의 죽음을 애도한 바 있다. 이벽의 세례명은 요한. 시인…
‘목인(木人)’은 글자대로라면 나무 인간이란 뜻이다. 한시에서 ‘목인’의 전고(典故·전거로 삼은 옛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비가 내리면 물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나무 인형 이야기다. 전국시대 소대(蘇代)가 진(秦)나라의 위험한 초대에 응하려는 맹상군(孟嘗君)을 이 비유로 만류한 바…
인형극에 사용되는 인형을 괴뢰(傀儡·꼭두각시)라고 한다. 당나라 양굉(梁鍠)은 꼭두각시 공연을 본 뒤 다음과 같이 읊었다. 중국에선 일찍부터 ‘괴뢰희(傀儡戱)’라고 불리는 인형극이 발달했다. 주(周) 목왕(穆王) 때 언사(偃師)가 만든 인형은 사람과 똑같이 노래하고 춤출 수 있었다…
장률 감독의 영화에선 익숙한 한시가 색다른 울림을 빚어낸다. ‘춘몽’(2016년)에서 고향 연변을 떠나 아빠를 찾아 한국에 온 예리는 식물인간이 된 아빠 병 수발에 차츰 지쳐간다. 예리는 달 밝은 밤 고향주막에서 당나라 이백의 시를 읊는다. 시인은 침상 앞을 비추는 달빛을 땅 위에 내…
병이 육신을 괴롭힐 때 우리는 나에게 왜 이런 병이 찾아왔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마이크 니컬스 감독의 ‘위트’(2001년)에서 에마 톰프슨이 연기한 주인공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도 병에 대처하는 자세를 다음과 같이 재치 …
2023년 달력의 끝이 다가온다. 송나라 소식(1037∼1101)은 1062년 연말 동생에게 부친 시에서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이렇게 썼다. 옛 풍속에 세밑이 가까워질 때 친지와 더불어 마시고 즐기며 한 해를 보내는 모임을 ‘별세(别歲)’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송년회를 연상시킨…
영화학자 자크 오몽은 영화 속에서 얼굴이 가장 민감한 이미지의 영역이라고 설명한다(‘영화 속의 얼굴’). 한시에서도 얼굴은 민감한 소재로 그림, 거울, 물 등 얼굴을 응시할 수 있는 매개물을 통해 ‘나 자신이기도 한 타자’를 주목했다. 당나라 백거이도 자신의 얼굴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
어린이가 지은 한시를 동몽시라고 부른다. 동몽(童蒙)이란 말에는 어리고 우매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어린이가 쓴 시라고 가볍게 볼 건 아니다. 조선시대 김여물(1548∼1592)이 열두 살 때 쓴 시는 다음과 같다. 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친구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잘못한 친구에게…
명말청초 77세의 노학자 부산(1607∼1684)은 아들 부미(1628∼1684)가 세상을 뜨자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곡자시(哭子詩)’ 16수를 썼다. 그중 아들이 남긴 시를 대상으로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늙은 아비는 아들의 삶과 예술의 족적을 되짚으며 아들을 …
영화 ‘팔도강산’(1967년)에서 노부부는 1남 6녀의 자식들을 만나려 전국을 일주한다. 강원 속초에 사는 여섯째 딸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효심이 깊어 더 애틋하다. 전통사회에서 시집간 딸을 ‘출가외인’으로 치부했다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딸을 두고 읊은 한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