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 유방은 막상 패왕과 마주치기만 하면 흠씬 두들겨 맞은 개처럼 꼬리를 사리고 도망쳤지만 돌아서면 그뿐이었다. 며칠
“만약 너까지 유방에게 빼앗겼다면 항양(項襄)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 조구(曹咎)조차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다.
“서광무(西廣武)는 무엇이며 혈창(穴倉)은 무엇인가? 또 산봉우리가 높아도 치고 올라가면 될 것이고, 산성이 가로막아
패왕 항우가 군사를 몰아 형양 동쪽에 이르렀을 때 이미 한왕 유방은 광무산으로 물러난 뒤였다. 앞서 살피러 보낸
“그렇다면 성고로 돌아가 항왕과 싸워보잔 말이오?” 장량의 말을 들은 한왕이 왠지 질린 듯한 얼굴로 그렇게
그때 한왕 유방은 형양성을 에워싸고 마지막으로 불같은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패왕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어 그
“성고가 떨어지다니? 대사마 조구는 어찌되었느냐? 과인이 떠나올 때 적지 않은 군사를 남겨 주고 사마흔과 동예까지
“과인은 지난날 양성(襄城)에서도 3만을 묻은 적이 있고 신안(新安)에서도 20만을 묻었다. 모두 과인에게 빨리
초나라 군사들의 모진 매질과 자신들이 떨어진 처지가 기막혀 괴로운 외침과 구성진 울음을 쏟아내는 것은 구덩이를 파
동문 쪽을 에워싸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급히 창칼을 집어 들고 맞섰으나 적병이 워낙 갑작스레 치고나온 터라 잘
그날 초나라 군사들은 날이 저물도록 공격을 퍼부었으나 외황성은 여전히 끄덕도 않았다. 날이 저물자 패왕은 징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들은 ‘거야택(巨野澤)의 100 소년’ 가운데 몇이라 했습니다.” “거야택의 100
하남(河南)이라고는 하지만 동짓달로 접어들자 외황(外黃)의 추위도 만만치 않았다. 성고를 떠날 때 나름대로 채
한왕이 무관(武關)을 넘어 진나라의 항복을 받고 그 도읍 함양을 차지한 것은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호기롭게
항양이 남은 500명과 더불어 수십 채의 수레를 보호해 10리쯤 가는데 다시 한나라 군사들이 따라붙었다. 뒤쫓는 쪽도 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