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양상이 그렇게 바뀌면서 해하(垓下)에서도 진성(陳城) 아래서와 같은 일이 되풀이 벌어졌다. 패왕의 군사
패왕이 한신의 전군(前軍)을 쪼개고 열어놓은 길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온 종리매와 계포의 군사들은 전군 가운데쯤에
그래도 처음 한동안 패왕 항우가 앞선 3만 초군의 돌격은 이전이나 다름없는 위력을 나타냈다. 한번 패왕의 기
“전에 대왕께서 이미 가르치신 바 있다고 들었는데, 네 어찌도 그리 말귀가 어두우냐? 대왕께서 이르시기를, 너를 죽
양군 모두 진세를 벌이는 동안에 날이 저물고 밤이 왔다. 섣달 중순의 길고 추운 밤이라 양쪽 진채에서 피어오르는 화톳
후군(後軍) 좌우를 맡을 장수까지 정한 한신이 잠시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군막 한구석에서 으르렁거리듯 외쳐 묻는
“대왕께서는 항우가 초나라 군사를 분발시키고 그 세력을 한군데로 집중시키는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오래잖아 장수들이 패왕의 군막으로 몰려들었다. 패왕이 내준 전서(戰書)를 읽어 본 계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무렵 패왕 항우는 해하의 낡은 성곽을 다 고치고 진채를 방벽과 보루로 둘러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
“항왕도 눈과 귀가 있으니 우리 군세가 얼마나 큰지를 알 것이오. 거기다가 제왕(齊王)과 회남왕 그리고 양왕이 각기 정
며칠 안 돼 해하 서북쪽 벌판에는 30만이 넘는 대군이 한나라의 깃발 아래 모였다. 크게 나누어 한왕이 몸소 이끄는
“우현(虞縣)의 한 산성에 들어 조참의 예봉을 피한 신은 어렵게 적진을 헤치고 팽성에 이르렀으나 그때는 이미 모
패왕이 진작 여음(汝陰)에서 회수를 건너 육현(六縣)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는 아직도 대
알아보게 변한 천하의 민심도 서초 땅을 점령하고 있는 한나라 세력 못지않게 강한 저항과 반발로 느껴져 패왕을
그 사이 한(漢) 5년 12월이 되었다. 그해 따라 추위가 길어 계절로는 이미 늦겨울에 접어들었는데도 해하(垓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