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정원, 하루키의 숲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정원과 숲이 건네는 위로가 고맙습니다. 그곳에 깃든 계절의 감각과 인생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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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분재를 스탠드 조명 옆에 두니 벽에 꽃 그림자가 비쳤다. 아, 이게 우리 옛 선조들의 식물감상 방식 ‘국영시서’(菊影詩序·방 안에서 국화 앞에 촛불을 켜서 벽에 비치는 그림자 감상)였구나…. 전남 담양 소쇄원 제월당 뒤 일렁이는 파초를 보면서는 생각했다. 조선 사대부는 연잎과 파…
봉선화, 동백, 해바라기, 앵초, 느티나무…. 어르신들의 가드닝 앞치마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 이름이 크게, 본래의 이름 석 자는 괄호 안에 작게 쓰여 있었다. 가을빛이 깊어가는 정원에 15명의 어르신이 모였다. 우울증을 진단받거나 정서적 지원이 필요한 분들이…
바스락~. 낙엽 카펫이 깔린 만추(晩秋)의 정원에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수줍은 듯 작은 연분홍 꽃을 피운 꽃댕강나무였다. 잎을 모두 떨어뜨린 653살 모과나무는 노란 열매를 금괴처럼 주렁주렁 달았다. 맞은편 단풍나무는 이에 질세라 빨간 별들을 하늘에 띄웠다.우리는 왜 정원에 가는가.…
키가 큰 금발의 남자는 멀리에서도 잘 보였다. 노랗게 물든 울산시 태화강국가정원의 나무들 아래로는 가을 억새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톤 다운된 초록색 진 재킷과 청바지 차림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찬찬히 땅을 살피고 있었다. 다소 심각한 표정이었다. “반갑습니다.…
화가와 정원의 조합은 꽤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화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클로드 모네나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예술만큼 식물에 정통한 위대한 정원사였다. 화가들은 서로의 정원을 탐색하며 감각을 열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정원을 선망한 메리 커샛 같은 미…
난지도(蘭芝島)는 본래 난초와 지초가 피는 꽃섬이었다. 조선 시대 김정호의 지도에도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초도’(中草島)로 기록돼 있다. 맑은 샛강 위로 버드나무가 늘어졌을 그 섬의 꽃향기는 얼마나 그윽했을까. 하지만 그 섬은 1978년 서울시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돼 거대…
며칠 전 산림청이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을 선정해 발표했다. 강원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과 제주 서귀포시 치유의 숲 등 우리에게 건강한 기쁨을 주는 숲들이었다. 왠지 울컥하면서 감격스러웠다. 1973년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이 수립돼 실행되기 전까지 한국은 헐벗은 민…
그는 남도의 소도시를 송두리째 바꿨다. 우리나라에는 없던 정원의 역사를 처음 썼다. 2007년 순천만 습지를 복원하고 2013년에는 순천만정원을 조성해 중앙정부도 시도하지 못했던 국제정원박람회를 열었다. 공무원 한 명이 도시의 경관을 바꾸고 도시의 브랜드를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
몇 년 전 유럽에 살 때, 아이들과 정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시싱허스트캐슬가든이나 그레이트딕스터가든 같은 유명 정원들도 다녔다. 그런데 정작 부러운 건 따로 있었다. 생활 속에서 누리는 정원이었다. 마을 곳곳의 가든센터에서 씨앗과 화분, 가드닝 용품을 고르는 …
민병갈 원장님. 선생님이 여든한 살 나이로 하늘나라 가시고 어느덧 21년이 흘렀네요. 달력이 9월을 말하기 시작할 때, 원장님이 생전에 정성껏 가꾸신 천리포수목원에 다녀왔습니다. 연못의 수련이 별처럼 빛나는 입구 정원부터 꿈결이 펼쳐졌어요. 햇빛에 반짝이는 노란색과 오렌지색 상사화, …
그는 대한민국 땅에 시를 쓴다. 고속 성장을 위해 달려온 도시 풍경에 느릿한 휘파람 같은 자연의 풍광과 소리를 담는다. 반세기 넘게 역사적 장소들의 조경을 맡아온 정영선 조경설계 서안 대표(82). 서울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올림픽공원, 선유도공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서울식물원, 아…
“엄마가 20여 년 가꾼 정원이 ‘아름다운 정원’ 상을 받았어요. 딸은 직장을 다니다가 늦깎이로 대학에서 정원을 공부하고 있고요.” 지인의 귀띔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시원한 팔당호를 끼고 운전하다가 숲길 쪽으로 접어들자 꽃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의 벽돌집이 나왔다. 경기 남양주시 …
불국토(佛國土)로 불리는 경주 남산 자락, 선덕여왕릉을 마주 보는 곳에 10만 평 숲이 있다. 여왕이 살던 시절, 서라벌엔 18만 호 기와집에 100만 명이 살았다고 하니 그땐 숲도 큰 마을이었을 게다. 신라인의 마을에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왜가리가 날던 논은 대한제국 시절 묘목장이…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대사를 통해 말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할까요? 우리가 장미를 어떻게 부르든 이름이 무엇이든 그 향기는 달콤할 거예요.” 이 말에 절반만 수긍한다. 장미는 향기가 달콤한 동시에 그 이름도 특별하다.긴 장마가 막 끝나고 …
제주의 현무암 돌무더기 사이로 잎이 작은 백리향과 담쟁이 넝쿨의 등수국이 반짝였다. 빗물과 햇빛을 받은 식물들의 초록이 유독 명료했다. 땅 위에서 기껏해야 세 뺨 높이로 심어진 산뚝사초는 지형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바닷가에서 주운 나뭇가지로 만들었다는 삐뚤빼뚤한 서체의 ‘베케’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