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대학 정년으로 연구실을 비우면서 얼마간의 책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도서관에서 그중 한 박스를 반송했다. 규정상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지난날 외국의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만든 복제본이었다. 지질과 제본 상태가 온전치 못해 본래부터 볼품이 없던 책이 퇴짜를 맞아 돌아왔으니…
저만큼 물러가다가 되돌아와 성급히 핀 여린 꽃잎을 할퀴던 지루한 겨울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천지를 뒤덮는 우리네 5월의 저 연두색이다. 처음, 시작, 출발의 색이 연두색이다. 초록을 향해 지금 막 솟아오르는 마음의 화살표가 연두색이다. 이런 5월을 가진 나라에 태어난 것을 늘 행복하게…
침실 뒤의 산비탈을 온통 다 덮은 개나리가 만개하자 황금빛이 반사되어 방 안에 가득해진다. 그토록 혹독하게 춥고 길었던 겨울, 심술궂게 봄 길을 가로막으며 훼방 놓던 찬비와 진눈깨비도 다 그치고 마침내 봄이 오는가. 차고 사나운 바다에서 들려온 참혹하고 비통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오랜만…
훌륭한 장서가에 비한다면 내 서재의 책은 초라한 편이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내 서가에서 필요한 책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책의 정리 배열방식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이 무질서는 내 정신의 내면적 지적 무질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만 같아 곤혹스럽다. 이런 무질서는 정도의 차이…
오랜만에 고향에 간 기회에 어린 시절의 모교를 찾아가 보았다. 아름답던 시골 초등학교의 대문은 녹슬고 교사는 거뭇거뭇한 얼룩을 뒤집어쓴 채 웃자란 잡초 밭 가운데 유령처럼 있었다. 100여 명이 뛰놀던 학교는 그 사이 면 소재지 학교의 분교로...
100여 년 만에 처음이라는 적설량이다. 안부를 묻자 전화 속 친구의 목소리가 오래 잊었던 풍경을 상기시킨다. “전원교향곡에서처럼 많은 눈이 쏟아졌어.” 베토벤의 음악이 아니라 앙드레 지드의 소설이다. 오래된 책을 펴본다. “사흘째 내리 퍼붓는 눈으로 길이 모두 막혀 버렸다. 나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