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들과 함께 터덜터덜 임대아파트 정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정문 옆 목련나무가 가로등 불빛에 훤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목련꽃은 빨리 지기도 하지. 어느새 꽃잎들은 하얀 빛깔을 잃고 젖은 수건처럼, 말린 가지처럼 축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마을버스 정거장 쪽으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사랑스러운 동생 슬기에게. 이렇게 가끔 늦은 시간까지 혼자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가족 생각이 많이 납니다. 될 수 있는 한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사실 가족 생각을 하면 허기가 더 많이 지거든요. 그러면 또 잠들기도 어렵고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지기도 합니…
늦었다. 그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계속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8시 25분. 담임목사 부부와 장로, 안수집사가 집으로 찾아온다고 약속한 시각은 저녁 8시. 저녁도 먹지 않고 최대한 빨리 온 것인데…. 그래도 또 아내는 찬바람 쌩쌩 날리면서 두 눈을 흘겨…
아아, 이거 꼭 마이크에 대고 얘기해야 하는 겁니까? 아이고, 평상시 형님 동상, 하면서 허물없이 지내다가 이렇게 돌아가면서 마이크에 대고 한마디씩 하니까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네요.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노인복지센터에서 만나 속풀이도 하고, 며느리들 흉도 보고 하니까, 정답기도 하고…
“아무래도 겨울엔 부의금 나갈 일이 많지요?” “원래 꽃 필 땐 축의금이 많이 나가고, 눈 내리면 부의금이 많이 나가는 법이지….” 부산으로 향하는 KTX 안, 박 팀장은 건성건성 성 대리의 말에 대꾸를 해주면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천안아산역 근처를 지날 때부터 흩날리던…
자를 것인가, 말 것인가?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자를 것인가, 아니면 눈 감고 딱 이십 분 만에 후딱 자르고 나올 것인가? 나는 길 건너 상가를 바라보면서 잠시 그런 고민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자를 때마다 나로 하여금 갈등과 번민과 고뇌에 휩싸이게 만드는 이유는 단 하나. …
“어디 보자, 77년 정사년 오월 생이라….” ‘해천 스님’이라고, 하지만 딱 보기에도 그냥 ‘해천이 아저씨’ 같은, 배가 불룩 튀어나온 대머리 사내가, 낡은 공책 한가운데 사주를 받아 적으며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앉은뱅이책상 뒤에 앉아 있는 ‘해천 스님’은, 아디다스 추리…
모태 솔로 남자들에게 호환마마보다 더 두려운 크리스마스 연휴가 다가오고 있으니, 작년 이맘때 개별 사례들을 통해서 본, 가지 말아야 할 곳, 하지 말아야 할 일,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여기에 따로 정리해두고자 한다.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 새겨듣고 같은 우를 범하지 말기를 …
그는 그때 분명 술이 조금 취해 있던 상태가 맞았다. 대학생 제자들과 1차로 중국 음식점에서 고량주를 마시고, 2차로 호프집에 들러 생맥주 네댓 잔을 기울인 이후였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제자들은 일곱 명. 남학생이 세 명, 여학생이 네 명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고 간 이야기들은 무엇…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생애 네 번째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아, 또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구나, 계절은 참 정직하기도 하지’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를 내는 것은 항상 이맘때쯤, 배추 농사 무 농사가 얼추…
태어나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지 못했던 그가, 기적적으로 여덟 살 연하의 주경 씨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은 지난달 말의 일이었다. 주경 씨, 그녀는 그가 다니고 있던 중장비 운전면허학원의 사무보조로 일하고 있던 여자였다. 나이는 이제 겨우 스…
그가 일곱 살 된 아들을 둘러업고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무렵이었다. 미열이 있었지만, 저녁식사도 평상시처럼 하고 스스로 양치질도 하기에 가벼운 감기려니 생각했는데, 잠자리에 들 무렵 상황이 돌변했다.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이내 구토를 하고 입술…
아침저녁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어떤 사람들에겐 아, 이제 또 어느새 가을이 왔구나 하는 신호로 읽히겠지만, 글쎄다, 초등학교 교사인 나에겐 아, 이제 또 그놈의 학부모 상담 주간이 돌아오겠구나 하는 압박감으로만 다가온다. 4월 둘째 주와 9월의 셋째 주. 해마다 돌아오는 이 학부모 …
어째 처음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한 내가 바보였다. 졸업유예 1년을 신청했다는 점 말곤 별다른 공통점도, 친분도 없던 대학 동기 준수가 며칠 자신의 고향집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했을 때, 그래, 그걸 함께 취업 못한 자들의 동지애적 손길쯤으로 생각한 것이…
처음엔 단순히 열대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어 보였거든요. 네, 맞습니다. 지난 6월 중순부터였어요. 사실… 저나 아이들이나 아내가 베란다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을 꽤 오랫동안 알지 못했던 게 맞습니다. 그땐 아내가 잠만 그곳에서 잤거든요.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