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벽화는 죽은 자의 생전(生前) 영광을 기리거나, 내세(來世)에서 누리고 싶은 삶을 형상화한 그림을 무덤 안
발해(698∼926) 건국에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 의지가 큰 역할을 했다. 고구려가 668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한국 고대국가와 고대사회의 지배이념으로 흔히 불교를 거론해 왔다. 그러나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고구려는 4세기 중엽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뒤이은 백제의 공격에 고국원왕이 전사하
바보 온달은 아마도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고구려인의 한 사람일 것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기록을 보
광개토왕비는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왕(391∼412)의 훈적(勳積)을 기리고 왕릉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 아들인
고구려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포섭된 ‘낙랑’은 그 위치와 성격문제 등이 고조선 붕괴 후 등장하는 낙랑군과 연결
《고구려는 어떻게 다스려졌는가. 왕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귀족의 정치적
《고구려 역사는 많은 부분이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고구려의 건국은 언제인가, 비련의 주인공 낙랑공주가 살
《벽화 가운데 고구려의 넘치는 에너지는 역사상(力士像)에 나타난다. 웃옷을 벗은 반라(半裸)의 육신이 남성적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육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 창 활 도끼 방패 등의 무기를 소지한 보병과 기병은 각각
고구려는 말을 소중하게 여겼다. 말을 소홀히 다루거나 죽이면 천민으로 전락시키거나 중형으로 다스릴 정도였다. 천
《‘고구려’ 하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말을 타고 산야를 누비던 용맹스러운 사내들이다. 그 기백 넘치는 말타기와
《고구려 사람들은 노래와 춤, 즉 가무(歌舞)를 즐겼다. 5세기 무용총, 장천 1호분, 마선구 1호분, 통구 12호분 등 특히
고구려 벽화고분들은 통상 부부를 합장한 묘제이다. 4세기 중엽 안악 3호분(황해도 안악군 용순면)처럼 5명이 넘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