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이라는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넘는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 수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지난달 5일 봉준호 감독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말한 수상소감에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갈채로 응했다. 지난해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한국 영화가 한 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 이유에 대해 ‘오스카는 지역(local) 축제’라고 답하기도 했다. 세계 영화산업의 심장부라는 할리우드가 언어와 지역, 인종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으로 확장되는 데는 언어의 전달, 즉 통역과 번역의 힘이 크게 작동한다. 영화 ‘기생충’의 거침없는 세계화에는 대사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고 이를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담아낸 영어자막이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의 솜씨다. 그의 손끝에서 서울대가 ‘옥스퍼드대’로, 카카오톡은 ‘와츠앱’으로, ‘반(半)지하’는 ‘세미 베이스먼트’로 재창조됐다. 짜파구리는 라면과 우동을 합친 ‘람동’이란 신조어로 태어났는데, 2시간 넘게 고민해 만들었다고 한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맨부커상을 안겨준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가 말한 대로 ‘번역은 작품을 창조적으로 다시 쓰는 작업’임이 분명하다.
▷“1인치 장벽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봉 감독은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끝난 뒤 한국 기자들과 가진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카데미상은 올해 처음 영어가 아닌 영화에 작품상을 줬고 외국어영화상을 ‘국제’영화상으로 바꿔 다양성을 강조했다. 언론은 ‘92년 오스카 역사가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으로 전기를 맞았다’거나 ‘비영어권 영화에 대한 미국인의 마음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평가를 쏟아냈다. 아카데미상은 2016년부터 백인 남성 위주 영화제를 바꿔야 한다는 비난에 시달려왔고 조금씩 그 한계를 넓히는 실험을 해왔다. 변화를 갈망하던 아카데미의 혁명을 한국의 영화 기생충이 혜성처럼 나타나 도운 셈이다.
▷기생충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번역의 힘만은 아닐 게다. 지구촌 모든 사회의 공통된 고민인 빈부격차를 다루면서도 획일적 선악 형상화에 매몰되지 않고, 강자든 약자든 ‘적당히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낸 데 대해 많은 이들이 문화와 인종의 차이를 넘어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대립과 분열 속에 계급과 성별, 민족, 인종 등 다양한 장벽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시대다. 할리우드에서 1인치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래서 더욱 즐거움을 주나 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