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운전사인 최모 씨(58)는 4년 전 부인과 사별했다. 병명은 원인 미상의 간질성 폐렴. 건강했던 최 씨의 부인은 살균제를 넣은 가습기를 사용하면서 기침을 시작하더니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숨을 거뒀다. 이 일로 중학생이던 아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하는 등 최 씨 가족에게는 한동안 악몽 같은 날이 계속됐다.
최 씨는 “(2월에) 정부가 직접 가습기 살균제가 폐질환의 원인이라고 발표했지만 정부나 가습기 살균제 판매 업체 모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뒷전”이라며 분노했다.
지난해 임산부와 영유아의 사망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옥시레킨벤키저(옥시) 등 4개 업체를 검찰에 고발하고 과징금을 부과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불거진 지 1년여 만에 정부가 처음으로 관련 업체를 처벌한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이번 처벌이 허위 광고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일 뿐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정위는 23일 유해한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하면서 제품 용기에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했다”고 허위 표시한 옥시와 홈플러스, 버터플라이이펙트, 아토오가닉 등 4개사와 대표들을 검찰에 고발하고 과징금 5200만 원을 부과했다. 업체별로는 옥시가 5000만 원, 홈플러스와 버터플라이이펙트는 100만 원씩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아토오가닉은 올 7월 폐업해 과징금을 부과받지 않았다.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 업체는 손세정제 등에 사용되는 살균물질인 ‘폴리헥사 메틸렌 구아니딘(PHMG)’ 또는 ‘염화 에톡시에틸 구아니딘(PGH)’을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를 팔면서 근거 없이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흡입해도 안전하다” 등의 문구를 썼다. PHMG와 PGH는 피부에 닿거나 소량을 먹을 때는 독성이 적지만 코로 흡입하면 폐가 부풀어 오르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등 치명적인 폐 손상을 일으킨다.
이태휘 공정위 서울사무소 소비자과장은 “이번 과징금은 표시광고법 위반으로 부과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라며 “또 이번 처벌로 피해자들이 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수 있는 길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정위 고발로 검찰이 기소해도 법원의 형량은 최대 1억5000만 원의 벌금형이나 최고 2년의 징역형에 불과하다. 더구나 ‘롯데마트’와 ‘글로엔엠’은 유해물질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를 팔고도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아 공정위의 처벌 대상에서는 빠졌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 사이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도 처벌 수위가 너무 낮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 피해자 신고를 받고 있는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현재까지 접수된 피해 인원은 사망자 52명을 포함해 176명에 이른다.
한편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은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 지식경제부가 2010년까지 ‘안전인증’을 내주는 등 정부의 책임이 있는 만큼 국가배상법에 따라 정부가 직접 피해자 배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조만간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 대표를 상대로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며 “안일한 대응으로 일관한 정부도 책임을 기업에만 떠넘기지 말고 피해자 배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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