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靜洙·韓正珍·申致泳기자」 조선족인 金延玉(김연옥·71·길림성 용정시출신)할머니는 지금 서울의 한 노인보호소에서 살고 있다.
김할머니가 서울에 온 것은 지난해 초. 길림성 용정시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장남이 심장병으로 퇴직하는 바람에 일가족의 생계가 막막하자 어렵게 초청장을 받아 입국했다. 서울서 돈을 벌어 생계에 보탬은 물론 장남의 수술비까지 벌어 돌아갈 계획이었다.
▼70대할머니 보호소행
그러나 김할머니의 이같은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7개월간 일하던 중소기업으로부터 돈도 못받고 결국 병까지 얻어 귀국도 못한 채 노인 보호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다.
김할머니는 29일 밤 고향에서 둘째아들이 보낸 편지를 다시 꺼내 읽었다. 벌써 몇번이나 읽고 또 읽은 편지다.
『존경하는 어머님. 그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고단한 몸으로 일터에서 돌아오셨겠지요. 먼 곳에 있는 자식들은 그저 근심뿐입니다. 어서 빨리 돌아오십시오. 인간사회에 「돈」보다 귀중한 것이 「정」입니다…. 어머니, 일하고도 받지못한 로동공자(품삯)는 꼭 받아내야 합니다. 70고령 늙은이의 로동대가를 무시하는 그런 회사장(사장)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세계 어느나라나 다 법이 있으며 법에서는 다 공민의 리익(이익)을 돌보고 있고 외국공민들도 똑같게 취급하고 있으니 유관 법률기관을 찾아가면 꼭 해결받을 수 있을 겁니다. 부디 몸 조심하십시오. 둘째아들 수연 올림』
편지를 읽는 주름투성이의 김할머니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김할머니는 자식들이 마음 아파할까봐 여태까지 자신이 병까지들어 보호소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본격적으로 교류가 시작된 것은 지난 90년. 당시 조선족 교포는 이국땅에서 고생해온 독립운동가들의 자손들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들의 이미지는 곧 「가짜 한약장수」 「골치아픈 불법체류자」로 추락하더니 급기야 조선족 선원 6명이 한국인 선장과 선원 11명을 살해한 「원양어선 페스카마호」사건이 터지면서 조선족은 「외국인노동자보다 못한 교포」로까지 떨어진 상태. 교류 6년만의 변화다.
그 반대 역시 심각한 상태. 한국인들의 연변에서의 사기행각이 속출하고 있는데다 조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불쾌한 이야기들로 한국인은 이미 「돈만 아는 인정머리 없는 놈」으로 각인돼 있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각의 차이는 이미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지난 90년 이후 한국을 방문한 조선족 교포의 수는 약 12만명. 2백만명의 조선족 전체인구를 감안할 때 10% 이상이 한국을 다녀간 셈.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조선족 교포수는 약 6만명이며 이중 불법체류자는 3만2천명 정도로 법무부는 파악하고 있다.
「가짜 한약장수」로 통칭되던 조선족 교포들의 한국내에서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94년부터. 중국제 한약재가 문제가 많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리식돈」(빚)을 내서 한약을 사가지고 왔다가 패가망신한 조선족 교포들이 속출했다. 자연 조선족들의 서울에서의 돈벌이도 한약장사에서 직접 취업을 하는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노동정책연구소가 지난해 현장조사를 통해 파악한 조선족 교포들의 취업형태는 건설현장에서 목공 벽돌공 등 잡일을 하는 사람이 41.3%로 가장 많고 요리사 식당종업원이 23.4%로 두번째. 결국 한국에 체류중인 조선족 교포중 남자가 60%임을 감안할 때 남자들은 대부분 건설현장으로, 여자들은 음식점이나 서비스업 또는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선족 교포의 월평균수입은 83만원. 네팔(56만원) 방글라데시(53만원) 필리핀(48만원)보다 높은 편이다. 중국에서 교사의 월수입이 한화로 5만원 정도임을 감안할 때 83만원은 그들에게는 큰 돈. 사실 1∼2년정도 큰 사고없이 착실히 모으면 중국에서는 20년이상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목돈을 모아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까지에는 많은 난관이 있고 이 난관에 부닥쳐 자신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고향의 가족집도 파산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많다.
우선 이들을 옥죄는 것은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지난해 입국해 공사장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는 金光澤(김광택·63·중국요령성심양시)씨는 『가끔 쉬는 날 관광을 하고 싶어도 불심검문이 무서워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고 기숙사에서 하루종일 지내게 된다』며 『하루하루 생활이 감옥 같고 고향생각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성폭행당하고도 참아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다. 94년 입국해 식당에서 주방 허드렛일을 해온 김모씨(여·38·흑룡강성)는 서울 면목동의 한 식당에서 식당주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나 식당주인이 오히려 『신고하면 불법체류자로 신고해서 강제추방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월급도 제대로 못받고 식당을 옮겼다. 공사판에서 일하며 한국인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억울하게 폭행을 당하고도 참아야 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열악한 주거환경도 이들의 한국생활을 고달프게 한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서 대부분 2∼4평짜리 「벌집」이나 셋방, 식당주방에서 생활하고 한달 생활비를 10만∼20만원정도 내에서 쓰다보니 영양 및 위생 상태도 엉망이다. 이러다가 덜컥 병이라도 걸리는 날이면 의료보험 혜택도 없어 모아놓은 돈을 다 써버려 1년 고생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십상이다.
94년 산업연수생으로 입국, 경기 오산시 D전선에서 일하던 徐福載(서복재·37·길림성영길현)씨는 전선을 감는 기계장치에 몸이 빨려들어가 갈비뼈가 부러지고 뇌수술까지 받았다. 35일만에 퇴원해 미처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일하다가 이번에는 기계의 톱날에 왼손까지 다쳤다. 담당 의사는 공장장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뇌수술을 받지 않으면 죽는다』고 까지 이야기했지만 서씨는 산재보험처리도 못받은 채 지금 건설현장에서 일을 계속하고 있다.
▼배신―수치심 안고 귀국
조국이라고 찾아온 교포를 「한국말하는 외국인 근로자」로만 취급하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이들을 더욱 분노케 한다. 지난 94년 입국해 경기 오산시의 영세공장에서 일해온 李用吉(이용길·36·길림성영길현)씨는 「차라리 외국근로자였으면 낫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국인 근로자들끼리 『거지같은 중국새끼들』 『되놈 새끼들』이라고 말하며 조선족 교포를 경멸하는 소리를 들을 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이 모든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한가지 어려운 시험이 또 남아 있다. 불법체류자로 붙잡힐 경우 불법체류기간에 따라 수백만원씩의 벌금을 내야 한다. 글자 그대로 「피같은 돈」을 뺏기게 되는 셈이다.
결국 몸이 망가지거나 사기를 당한 교포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한국을 떠나고 돈을 번 교포는 조국에서 받은 모멸감을 간직한 채 귀국선을 타게 된다. 이들이 고향에 들어가 「조국」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굳이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