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니는 복동이가 아니여. 준성이여. 김준성…』
金忠煥(김충환·51) 金六禮(김육례·45)씨 부부는 아홉살 때 잃어버린 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벙어리아들」 金俊成(김준성·25)씨를 부등켜 안고 흐느끼며 말했다. 16년7개월만에 찾은 아들은 이름도 「張福童」(장복동)으로 바뀐 채 의젓한 청년이 돼 있었다.
아들 준성씨도 꿈에서만 보며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부모님의 품에서 말없이 「억억」소리를 내며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 김씨가 장남 준성씨를 잃어버린 것은 80년 5월19일 광주시 전남도청앞에서 였다. 선천성 청각장애인으로 당시 9세였던 아들 준성군을 광주에 있는 한 농아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이날 광주로 함께 갔다가 그만 「난리」를 만났다. 수많은 군중이 민주화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댔다. 전남 장흥군 장평면 제산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김씨는 처음 맡아보는 독한 최루가스로 눈도 제대로 못뜬 채 허위적거리다가 시위군중에 밀려 그만 9세짜리 어린 아들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벙어리아들」과의 생이별은 이렇게 시작됐다.
준성군은 그 다음날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북 순창의 공용버스터미널에서 경찰에 의해 발견돼 순창애육원(원장 朴錫恩·박석은)에 넘겨졌다. 벙어리인 데다가 부모이름과 주소는 물론 자신의 이름 조차 모르는 준성군은 당시 누가봐도 「내다버린 애」였다.
이 애육원에서 「장복동」이란 이름을 얻어 4년여 지낸 그는 84년 7월 경남 양산군 무궁애학원이란 농아학교에 입학해 6년만에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견디기 어려운 냉대와 차별이었다.
여러 공장을 떠돌았으나 자꾸만 떠오르는 부모생각과 장애인이기 때문에 겪어야하는 차별이 그를 방황케 했다.
한편 아들을 잃어버린 김충환씨부부는 10여년간 아들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고향의 논밭을 모두 팔아버려 가세도 기울대로 기울었다.아버지 김씨는 그 후 술타령으로 보내는 나날이 계속됐다.
16년이 넘도록 서로 생사를 모른 채 살아온 이들 부자의 재회는 지난 6일자 東亞日報 사회면 「휴지통」에 「청각장애인 장복동씨가 어릴적에 헤어진 부모를 찾는다」는 사연이 보도되면서 이뤄졌다. 이 기사를 읽은 김씨부부는 단번에 「내 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씨부부가 서울에 도착, 신문에 난 「장복동」씨를 만난 것은 지난 8일 밤. 부모 자식간에는 말이 필요없었다. 얼굴을 대하는 순간 서로를 알아봤다.
어머니 김육례씨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아들은 어머니 김씨의 오른쪽 눈아래에 난 깊은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릴적 기억 속의 어머니 얼굴에는 없었던 상처라는 뜻이었다.
『그려. 이 상처는 니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없었지.확실히 내 아들이 맞구먼』지난 80년 이후 「장복동」이란 이름으로 살아온 한 청각장애인이 16년7개월만에 본래의 이름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
아버지 김씨는 아들을 찾지 못하자 광주사태의 와중에서 죽은줄로만 알았고 광주민중항쟁유족회 등의 권고에 따라 당국에 아들을 「광주사태관련 실종자」로 신고했다. 이에 따라 지난 89년 두차례에 걸쳐 당국으로부터 위로금 1억2천만원을 받았다. 김씨부부는 잃어버린 아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고향을 등지고 광주로 이사, 새 삶을 일구는데 이 위로금을 모두 써버렸다.
장남 준성씨를 포함해 모두 7남매를 둔 김씨는 현재 공장에서 폐수처리하는 잡역부로 일하며 겨우 살아가고 있는 형편. 김씨부부는 『아들 준성이가 살아서 돌아와 기쁘기 짝이 없으나 정부가 위로금을 다시 내놓으라고 할 것이 아니겠느냐』며 속을 태우고 있다.
〈金載昊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