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제91조가 국헌문란을 정의하면서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과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의 두가지를 들고 있는 것은 국헌문란의 대표적인 형태를 예시하여 그 해석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국헌문란과 같은 추상적 개념에 해당하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한정하여 열거하는 것은 원래 불가능하고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 규정에 직접 해당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도 위의 두 가지 경우에 못지 않는 중요한 국헌침해행위가 있다면 이것 역시 형법상의 국헌문란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형법이,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으로 전복하는 것을 내란으로 단죄함을 특히 예시하고 있는 까닭은,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은 법을 집행하는 것 이외에 헌법을 수호하는 보다 중요한 소임을 가진 기관이므로 특히 그 보호의 필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 즉 헌법기관보다 더 중요한 헌법 수호의 임무를 가진 기관이나 집단이 있다면 이러한 집단이나 기관도 당연히 내란죄의 보호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민주주의국가의 국민이야말로 주권자의 입장에 서서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을 수호하는 가장 중요한 소임을 갖는 것이므로 이러한 국민이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넘어 집단이나 집단유사의 결집을 이루어 헌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일정한 시점에서 담당할 경우에는 이러한 국민의 결집을 적어도 그 기간중에는 헌법기관에 준하여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민의 결집을 강압으로 분쇄한다면 그것은 헌법기관을 강압으로 분쇄한것과마찬가지로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보지않으면안된다.
이 사건에서 보면 피고인들이 국회를 봉쇄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주요정치인들을 구속하고 비상계엄을 부당하게 전국으로 확대한 행위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국헌을 문란케 한 행위이므로 광주시민들이 이를 항의하는 대규모의 시위에 나온 것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할 것이고 이를 피고인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난폭하게 제지한 것은 강압에 의하여 그 권한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어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설혹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원래 국헌문란의 죄에 있어서 강압의 폭동의 대상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인데 이 사건에서 보면 피고인들이 국헌문란행위를 항의하는 광주시민의 시위를 난폭하게 제압함으로써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케 하는 효과를 충분히 거두었다고 인정되므로 이러한 측면에서도 피고인들의 시위진압행위는 국헌문란행위에 해당한다.
(나)병력의 동원
앞에서 본 국헌문란의 사태는 대부분 피고인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한 결과로 일어난 것이고, 전쟁이 없는 시기에 국내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헌법기관 등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하거나 무력의 시위를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강압의 효과가 가장 큰 실력의 행사이므로 국헌문란의 결과를 일으킬 원인행위가 되기에 충분히다.
㈐모의와 사전준비
피고인들은 1980.5.17 및 그 이후의 병력 동원에 앞서 뒤의 범죄사실란 판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사전준비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
①1979.12.12의 군사반란에 성공한 뒤 곧바로 피고인 노태우는 수경사령관에, 피고인 유학성은 제3군사령관에, 피고인 황영시는 육군참모차장에, 피고인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에, 피고인 주영복은 국방부장관에, 피고인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에 각 임명되어 군의 지휘권을 명실상부하게 완전히 장악하였다.
②피고인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다시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하여 정보기관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③1980.5월 초부터 피고인 전두환의 지시에 의하여 보안사정보처장 권정달과 피고인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이 비상계엄의 확대, 국회해산,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준비하고 피고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정호용등과 회동하여 이를 검토하고, 피고인 이희성, 주영복에게도 이를 설명하여 그들의 협조를 받기로 하였다.
④이와 함께 피고인 이학봉 등이 예비검속대상자, 권력형 부정축재를 이유로 재산을 몰수할 대상자, 정치활동을 금지할 대상자 등을 선정하였다.
⑤1980.5.17. 10:00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건의하는 결의를 하였다.
⑥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되는 사태가 올 것에 대비하여 5.3 특전사령부 예하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키고, 5.6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소요사태 진압부대로 사용할수 있도록 조치하는 한편, 5.6부터 5.9까지 2군 및 수도권지역 전 부대를 대상으로 소요 진압 준비태세를 점검하고 5.8.01:00 포천에 주둔하고있던 13공수여단을 서울 거여동 3공수여단 주둔지로, 5.10. 01:00 화천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수여단을 김포 1공수여단 주둔지로 각 이동 배치하고, 5.9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추가로 소요 진압에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아울러 5.14.13:00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 준비지시를 하달하여, 차후 명령에 따라 수도경비사령부는 특전사 예하 4개 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북지역의, 수도군단은 9공수여단을 작전통제하여 수도권 강남지역의, 2군사령부는 7공수여단과 해병 1사단 2개 연대를 작전통제하여 부산, 대구, 광주지역의 각 소요사태 진압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나 관계장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17:30 3공수여단을 국립묘지에 배치하고, 18:25 청와대 등 특정경비지역 방어를 위하여 광화문 지역 경찰 저지선 뒤에 수경사 9개중대와 화학지원대를 배치한데 이어 20:29 전국 71개 방송국 및 중계소에 경계 병력을 배치하고, 5.15.12:00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 61,62연대를 잠실체육관과 효창운동장으로 5.17, 00:01 20사단 60연대를 태릉으로 각 이동시키는 등 계엄군의 예비이동을 실시하였다.
㈑결론
그렇다면 피고인들은 사전에 모의하고 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그 결과 국헌문란의 사태를 야기한 것이므로 피고인들은 1980.5.17이후의 이 사건 범행 당시에 국헌문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정된다. 이와 다른 피고인들의 주장은 이유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