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희망찬 새해?

  • 입력 1997년 1월 12일 19시 53분


우리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입버릇처럼 『희망찬 새해』라고 말해본다. 인간이란 내일에 대한 희망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금년 새해 우리 마음 속 깊이에는 이 해는 어려운 해, 우울한 한해라는 느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우울증은 사사로운 개인 사정에서보다 우리나라 사회 형편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 자신의 경우에는 동아일보가 지난해 말 4회에 걸쳐 집중 보도한 중국으로 빠져나온 우리 동족들, 이른바 탈북자들의 기막힌 사정으로 말미암아 우울증이 한층 더해진 것만 같다. 해방직후 남쪽으로 38선을 넘는다는 것도 천신만고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가도 생계가 막연하다고 북녘 땅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탈출이야 그 얼마나 무서운 결단이겠는가. 신문은 중국공안당국의 추산이라고 하면서 중국으로 오는 탈북자는 연간 1천∼2천명, 94년과 95년 중국 땅에서 붙잡혀 송환된 수는 1백40명 정도라고 했다. 북한에 송환된다는 것은 지옥으로의 길, 공개 처형에로의 길이다. 그것은 「코 안쪽이 철사로 꿰어져 있었고」, 「손바닥이 철사로 뚫린 채 묶여 있어 피가 줄줄」 흐르는 상태로 총살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반역을 저지른 죄인」이라고 하면서 탈북자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사람일수록 체제에 충성하는 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민족은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그런데 한국정부는 「북한의 고위인사 등 이용가치가 있는 탈북자들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솟구쳐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나는 몇년 전 일본에서 보내온 비디오 테이프를 다시 보면서 한숨지었다. 그것은 NHK 특별프로 「유럽 피크닉」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989년 여름 많은 동독 사람들이 헝가리로 피해서 서독으로 갈길을 찾고 있었다. 그때 오스트리아에 가장 가까운 헝가리의 소프론이라는 촌락에서 「유럽은 하나」라고 하는 사람들이 유럽 피크닉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그 대회에 참가했던 동독인들이 흥분의 절정에서 국경선의 조그만 문을 뚫고 오스트리아로 돌진한다. 헝가리 국경 경비대는 이것을 수수방관했다. 감격과 눈물의 도가니였다. 그런데 사실 이 배후에는 헝가리 개혁파 공산당 정권의 결연한 자세가 숨어 있었다. 그 당시의 총리 네메트의 증언기록에는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서독에 가기를 희망하는 동독출신 독일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네메트총리의 자세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헝가리가 인권에 있어서 2류국가가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는 월경하는 독일인들에게 발포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서독과 인권외교 비밀외교가 전개됐다. 그 자신이 비밀리에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 콜총리는 『무슨 보상을 원하는가』고 물었다. 네메트는 『원하는 것이란 없다. 양심에 따라 결정했을 뿐이다』고 대답했다. 이 때 콜총리는 그 당당한 체구를 흐트러뜨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와 독일 국민은 당신과 헝가리 국민의 용기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인권의 사각지대란 말인가. 인권을 향한 외교, 비밀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인권2류 국가가 돼서는 안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머리를 드니까, 지난해12월26일 새벽 안기부법개정안과 노동관계법개정안 등의 여당단독 기습 날치기 통과라는 뉴스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마치 내 생각을 비웃는 듯이. 그것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듯이. 그래서 나는 『희망찬 새해라고?』 하며 자조적으로 되뇔 수밖에 없었다. 지 명 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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