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기자] 26년전 봄.
제주도 서귀포시의 자그마한 감귤농장에서 봄볕아래 마디굵은 손을 놀리던 한 촌로가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1.4후퇴 때 황해도 송화에서 홀몸으로 내려와 평생 아내와 함께 맨손으로 일구어온 4천평 남짓한 귤농장이 눈 안에 들어왔다.
나뭇가지 여기저기에서 내민 새싹을 쓸어보던 촌로는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나머지는 돌려주고 가자. 여기서 이만큼 일구고 살았으니…』
육영재단 「동아 꿈나무」의 묘목은 이렇게 첫 뿌리를 내렸다.
71년3월 吳達坤(오달곤)씨는 서울 광화문네거리에 있던 동아일보사를 찾아와 감귤농사를 지어 모은 돈 1백만원을 내놓았다. 당시 대학졸업자의 초봉이 불과 2만∼3만원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한 거금이었다.오씨는 농장이름을 딴 「현암(玄岩)장학금」으로 기탁하면서 『동아일보 창간 1백주년이 되는 2020년부터 가난한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보태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오씨는 8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10여차례에 걸쳐 귤농사로 모은 1천7백만원을 맡겼다. 장례비도 남기지 않은채 오씨가 가버린 뒤에는 외아들 雲峰(운봉)씨가 두차례에 걸쳐 5백만원을 보내왔다.
오씨의 뒤를 이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동아 꿈나무에 장학금을 희사하는 독지가가 줄을 이었다.
72년3월에는 국회의원과 민선 서울시장을 지낸 金相敦(김상돈)씨가 자녀들이 사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마음은 늘 조국과 함께 있다』며 1백30만원을 맡겼다. 김씨는 미국에 살면서도 알루미늄캔을 주워 개당 8센트를 받고 팔아 모은 1백21달러를 송금해오기도 했다. 86년 작고한 뒤에는 유족이 조위금 6천48달러를 고인의 유언에 따라 꿈나무재단에 기탁했다.
74년에는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육순의 농부 吳光洙(오광수·78년 작고)씨가 평생 사모은 논 6백평을 팔아 2백만원을 보내왔다.의사였던 吳昶昕(오창흔·89년 작고)씨는 77년 청력장애를 가진 여섯째딸이 20세에 생을 마감하고 떠나자 『내딸과 같은 신체장애 학생을 위해 써달라』며 딸의 애칭 「청란」을 넣어 「인산청란종덕회」라는 장학재단을 꿈나무재단 내에 만들었다.
작고한 모친의 추모기일마다 장학금을 보내오는 중년의 신사, 돌쟁이 아이를 잃은 뒤 아이 생일이면 장학금을 보내오는 젊은 부부, 졸업을 하며 어려운 후배를 위해 학창시절 한푼두푼 모아온 돈을 털어놓고 간 고교생들, 한사코 이름을 밝히기 거부하며 꼬깃꼬깃한 돈을 내놓고간 익명의 독지가들….
수많은 기탁자들의 따뜻한 손에 의해 동아 꿈나무는 첫 뿌리를 내린 지 26년만에 73억원의 거목으로 자라났다.
현재까지 동아 꿈나무재단에 성금을 맡긴 독지가는 단체기탁자를 포함해 모두 1백73명. 이중 두차례 이상 기탁자가 55명이고 10회이상 연속 기탁자도 9명이다.
金潤哲(김윤철)서광산업회장은 올해 8년째로 57회에 걸쳐 장학금을 보내왔다.
동아 꿈나무재단은 2020년까지 기다리지 않고 동아일보 광고탄압 시절 국민이 내놓은 성금 전액 5억원을 기금으로 지난 85년부터 장학사업을 펴기 시작했다. 지난해의 경우 중고교생 6백61명에게 모두 2억여원의 장학금을 전달, 독지가들의 뜻을 기렸다.
[알림]
고 吳達坤씨의 가족되시는 吳雲峰씨를 찾습니다. 연락처 동아꿈나무재단 02―361―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