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泰愚(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95년 11월초. 노전대통령에게 돈을 준 국내 30대 재벌총수들이 줄줄이 대검찰청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 중 한명인 모 재벌총수는 수사검사와 마주 앉자마자 金泳三(김영삼)대통령에게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물론 검사가 묻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이 재벌총수는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얘기하면 노전대통령에게 돈을 준 것에 대해 심하게 추궁당하지 않고 형사처벌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한 것 같다는 것이 검찰관계자가 전한 후일담이었다.
검찰은 당시 이 총수의 행동을 괘씸하게 여겨 강도높은 수사를 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로는 「금기사항」이나 다름없던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수사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 울며겨자먹기로 수사를 제대로 하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수는 결국 형사처벌을 면했다.
검찰관계자는 『김대통령에게 대선자금을 준 사실을 털어놓으며 검찰을 「협박」한 총수도 더러 있었다』면서 『그러나 결과적으로 검찰이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파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검찰은 노태우 全斗煥(전두환)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을 수사하면서 재벌총수들에 대한 직접 조사와 광범위한 계좌추적 과정에서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조성과정과 규모를 상당부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총수들은 국민회의 金大中(김대중)총재에게 준 대선자금과 정치자금에 대해서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관계자들이 사석에서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수사하게 되면 김총재의 대선자금도 어떤 행태로든지 수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지난 93년 현정부 출범 이후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을 본격 수사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 때처럼 수사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대선자금을 부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김대통령 대선자금의 꼬리가 처음 검찰 수사에 잡힌 것은 현정부 출범 직후의 동화은행비자금사건 수사 때였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咸承熙(함승희·현재 변호사)검사는 계좌추적 과정에서 한보그룹 鄭泰守(정태수)총회장의 비자금을 발견했다. 그는 비자금을 추적하다 일부가 김대통령측 비자금 계좌에 흘러들어간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검사는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조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李源祚(이원조)전의원의 수백억원대 비자금계좌도 발견, 입출금 내용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김대통령의 대선자금으로 보이는 계좌가 발견돼 추적작업이 이뤄지자 검찰 고위간부가 『그 돈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며 함검사에게 「압력」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함변호사는 『당시 이전의원의 계좌에서 나온 돈을 추적했더니 일부가 민주계 실세의 계좌에 유입된 사실을 확인했으나 이들의 저항이 거세 계좌추적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94년초 대검중수부가 전직대통령의 비자금을 파악하기 위해 대기업회장들을 은밀히 불렀을 때도 김대통령 대선자금의 일부가 드러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조사는 「5,6공 신당설」이 나돌아 두 전직대통령의 비자금을 알아보기 위해 극비리에 진행된 것이었는데도 일부 재벌총수들은 처벌을 두려워해 『현정부에도 도움을 주었다』며 액수가 적힌 증빙서류까지 제출했다는 것.
검찰은 현재 진행중인 한보비리와 金賢哲(김현철)씨 비리의혹사건 수사과정에서도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실체를 상당부분 파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정총회장이 김대통령에게 준 대선자금의 규모도 파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돼 있다.
정총회장은 지난달 7일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92년 대선자금과 관련해 검찰의 조사를 받았느냐」는 국민회의 金元吉(김원길)의원의 질문에 『이번 조사는 연못에서 물을 다 퍼내 밑바닥을 싹싹 들추어 내듯이 강도높게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검찰은 대선자금에 대한 조사여부는 물론 결과를 전혀 공개하지 않아 뭔가 말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검찰은 최근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가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자 내부적으로 은밀하게 수사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관계자는 『대선자금 문제는 김대통령 스스로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검찰의 기본입장』이라면서 『그러나 노전대통령 비자금사건 때처럼 돌발적인 변수로 인해 수사에 착수할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이 파악한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규모와 조성경위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일단 수사에 착수하면 대선자금의 실체를 밝히는데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수준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관계자는 『이달 중순경 발표할 예정인 대국민 담화에서 김대통령이 대선자금을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따라 향후 수사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검찰은 김대통령이 92년 대선자금을 스스로 공개하더라도 법적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이다.
우선 선거자금으로 수천억원을 사용했다면 대통령선거법 제165조의 법정선거비용 한도액(3백67억원)규정을 위반한 것이 된다.
대통령선거법상 법정선거비용 한도액 초과의 공소시효는 6개월로 이미 시효가 지났다. 그러나 대통령 재임기간중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법정선거비용 한도액을 초과했다면 퇴임후 약 4개월동안 공소시효가 남게 되는 만큼 사법처리의 대상이 된다.
검찰은 김대통령이 대선기간중 조성한 선거자금을 중앙선관위에 사실대로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사실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김대통령에게는 「공무원이 될 사람에게 당선후 대가를 바라고 뇌물을 준 경우에 처벌하는」 사전뇌물수수죄가 적용될 수 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김대통령이 대선 당시 의원직을 사퇴한 만큼 자연인 신분으로 단순히 개인끼리 주고받은 돈이어서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국민회의 김대중, 자민련 金鍾泌(김종필)총재는 낙선한데다 공소시효가 정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규명 차원의 조사는 이뤄지더라도 처벌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다.
검찰 관계자는 『김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는 형사소추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안정과 정상을 참작해 기소유예 등의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기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