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가 출범한 해인 지난 93년 가을경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은 92년 대선자금문제의 해법으로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대선 당시 거액의 선거자금을 사용한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고 앞으로는 일절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국민투표를 통해 신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대선 당시 재벌들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은 사실이 공개됐을 때 자신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흠이 갈 것을 우려, 이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때 김대통령이 92년 대선자금 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지금이라도 김대통령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난해 말 청와대에 대선자금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입장표명을 건의한 적이 있다는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김대통령은 그후 盧泰愚(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이 마무리된 95년말에도 대선자금공개를 적극 검토, 청와대비서실과 사정당국에 대선자금의 내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국민회의 金大中(김대중)총재가 노씨로부터 20억원을 지원받은 사실을 「고백」하면서 대선자금문제가 핫이슈로 떠올랐을 때였다.
그러나 대선 당시 민자당은 물론 사조직 등에서 사용했던 대선자금의 전체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면서 이때도 대선자금문제는 다시 파묻히고 말았다.
이어 지난해말 여권일각에서 대선자금문제를 정리하자는 의견이 대두됐으나 어느 누구도 김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려하지 않아 역시 무산됐다. 당시 논의과정에 관여했던 여권의 한 인사는 『金光一(김광일)비서실장 등 여권의 핵심인사 몇 명이 모인 자리에서 97년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대선자금문제를 언급하고 국민들로부터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어느 누구도 대통령에게 이를 건의하는 것을 꺼렸다』고 회고했다. 이미 대선자금문제에 관한 한 「공개불능」쪽으로 마음을 정한 김대통령에게 이를 건의하는 것은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지금도 92년 대선자금문제와 관련, 여권내에서는 「절대불가」주장과 「정면돌파」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차기정권에서까지 대선자금문제가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김대통령 스스로가 임기 중에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인식이 여권내에서 확산되고 있다.
한보사건 이후 대선자금문제가 정가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오는 12월에 실시되는 15대 대선의 고비용구조가 논란이 되고 있다. 대선예비주자들은 여야 할 것없이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이번 선거 역시 과거 대통령선거의 재판(再版)이 될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되면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의 경우 후보당 법정선거비용한도액은 5백20억원정도(중앙선관위 추정액)로 예상되지만 과거의 선거운동양상이 되풀이될 경우 이를 지킬 수 있는 후보는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신한국당의 한 대선예비주자는 과거 방식으로 선거를 치를 경우 최소한 2천억원은 들어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당내 경선과정에서 들어갈 비용은 제외돼 있다. 이 후보의 진영에서는 선거기간 중에만 대략 △유세비용 7백억∼8백억원 △지구당 지원금 5백억∼6백억원 △기타 홍보비용 5백억∼6백억원 등은 족히 들 것이라고 추산했다.
『우리 모두 교도소 담장위를 걷고 있으며 「아차」하는 순간 교도소 안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전 일본총리의 「교도소 담장론」이 새삼스레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도 「법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각 후보들의 딜레마를 반영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선거전문가들은 『과거와 같은 대규모군중집회중심의 전근대적 선거운동방식을 벗어던지는 것 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 군 구별로 3회까지 개인연설회를 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선거법 규정대로 하면 선거기간 중 후보별로 9백회정도의 유세가 허용되는데 여기에 수백만명의 유권자들을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법정선거비용의 2배는 훌쩍 뛰어넘는다는 계산이다.
朴贊郁(박찬욱)서울대교수는 『대규모 군중집회는 막대한 비용이 들뿐 아니라 올바른 정보전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후보간의 정책토론을 활성화할 수 있는 TV토론회나 내용이 엄격히 제한된 홍보광고를 활용하는 방안이 확대돼야 한다』고 밝혔다.
박교수는 또 『국민들의 혈세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점도 있지만 선거공영제를 확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이 선거운동방식을 고치더라도 지금의 선거풍토에서는 막대한 선거자금이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張達重(장달중)서울대교수는 『각 후보들이 선거법에 정해진대로만 선거운동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선거법을 어길 경우 반드시 법적인 심판을 받는다는 인식이 심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장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선관위의 권한강화와 검경의 중립성 확보가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또 선거때만 되면 손을 벌리거나 후보들이 뿌리는 돈을 용인하는 유권자들의 의식도 대선에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92년 대선 때 여야 후보로부터 엄청난 돈이 풀려 나갔지만 결국 이 돈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바로 유권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조직중심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도 이번 대선에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병폐로 지적되고 있다.
朴基洙(박기수)중앙선관위 선거관리관은 『우리 정당의 비민주적 구조 때문에 정당이 제 구실을 못하면서 선거 때만 되면 사조직이 등장하고 있다』며 『사조직을 통한 선거운동이야말로 규모를 추산할 수 없는 불법선거비용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또 『선거 때 못지않게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당내 경선과정에서부터 철저한 감시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견임을 전제로 『각 정당의 경선관리위원회에 경선후보들이 비용명세를 신고, 공개토록 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며 『그렇게 할 경우 각 정당내에서 후보상호간의 견제로 자율적인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번 대선의 관리자가 될 김대통령이 신한국당 총재직을 사퇴, 선거를 공정하고 깨끗하게 치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인하대 李永熙(이영희)교수는 『김대통령이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소속된 집권당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겠지만 과감히 당 총재직을 버리고 당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공정한 선거관리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김대통령이 재임 중 해야 할 마지막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김정훈기자〉
|1부 「대선자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