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경제수석이 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어 특정기업에 대한 대출을 부탁했다해도 그 자체가 외압은 아니다」.
「국가기간산업(철강산업)의 신기술(코렉스공법)도입 등 관련사항은 통상산업부장관에게 보고없이 과장선에서 소신껏 처리한다」.
「대기업에 대한 수조원대의 대출이라도 은행들이 자체적인 판단으로 처리할 일이지 정부가 간섭할 수는 없다」.
▼ 책임회피 “위험수위” ▼
한보청문회에서 공무원들이 한 말들은 우리경제가 금융 및 산업정책 등 모든 분야에서 선진화돼 있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들 일색이다. 공무원들의 말에서 추론한다면 한보사태의 책임은 경제수석의 순수한 부탁전화를 외압으로 오해한 은행장, 한보철강의 재무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엄청난 자금을 빌려준 금융기관, 코렉스공법의 경제성에 대해 오판한 통산부과장 정도다.
TV를 통해 청문회를 지켜본 A그룹의 K이사는 『증인으로 나온 고위공직자들의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한 일이 뭔가』라며 『평상시 수백건의 인허가 서류를 요구하며 사사건건 참견했던 공무원들은 다른 나라 공무원들이었나』고 꼬집었다.
관가에 만연한 책임회피 풍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보사태 이후 오히려 심해진 느낌이다.
지난달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의 처리를 위해 만든 금융협의체가 출범했을 때 재정경제원은 협의체 구성을 교사한 배후세력으로 지목됐다. 세간에는 도산 일보직전의 진로그룹에 대한 특혜가 아니냐는 비난까지 일었다. 재경원 관리들은 『순수하게 금융기관들이 판단, 출범시킨 기구다. 기업을 죽이고 살리는 일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경제부처 고위관리는 『재경원 고위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은행들을 부추겨 만들긴 했는데 제2금융권 반발이 크다. 제2금융권의 협의체 참가를 위해 설득 작업중」이라고 말하더라』고 귀띔했다.
은행들을 부추기고 제2금융권을 설득하긴 하지만 정부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재경원의 한 서기관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영향력은 행사하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경제부처의 전형적인 일처리 방식』이라고 해석했다.
한보부도 이후 과천의 경제부처 관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답변의 메뉴는 『개별기업이 알아서 할 일』아니면 『금융기관들이 판단할 일』이다.
뒤집어보면 『공무원들이 할 일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3월 검찰이 한보사태 관련 고위공무원들에게 직권남용죄를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과천 관가에서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정책조정행위를 범죄행위와 같은 차원으로 보고 처벌한다면 어느 공무원이 소신껏 일하려 들겠느냐』며 반발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정치권의 입김에서 비롯된 특혜, 민간의 의견을 무시한 권위주의에서 나온 독선 등은 관료의 소신에 따른 정책조정행위와 분명히 구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 정부가 지난 78년 경영위기에 처한 크라이슬러사에 20억달러(당시 환율로 약 1조원)가 넘는 구제금융을 해 준 것은 정책조정행위와 특혜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라이슬러는 끊임없는 자구노력으로 상환기간이 7년이나 남은 83년 정부에서 빌린 자금을 모두 갚고도 7억달러의 순이익을 남기며 회생에 성공했다.
수조원의 자금지원에도 불구하고 침몰한 한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재경원의 한 국장은 『위에서 결정하면 밑에서는 당연히 따라야 하는 풍토가 문제』라며 『사소한 정책결정에 대한 하부의 문제제기는 더러 수용되기도 하지만 한보나 최근 진로지원책 같은 중차대한 「고공 플레이」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예의』라고 말했다.
정책결정과정에서 문제점이 발견돼도 「No」라고 말할 수 없고 문제제기를 할수 없다며 체념한 뒤에는 문제점이 보이지 않게되는 분위기다.
▼ 문제제기 아예 체념 ▼
게다가 최고권력자와 인연이 있는 인사 위주로 부처의 주요 보직이 구성되면 상명하복이라는 공직사회의 시스템과 맞물려 부처전체가 한 사람을 위해 뛰게된다는 것이다.
지난 3월 개각때 재경원 내무부 공보처 등 3개부처 차관에는 경남고 출신 등 소위 부산경남(PK)인사들이 임명돼 대선을 앞두고 자금 조직 홍보를 친위조직으로 꾸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 재경원만해도 현정부가 들어선 이후 금융정책실장 예산실장 등 핵심 요직은 PK인사의 몫이었다.
민간기업에 대한 관리들의 고압적인 자세는 법제화되지 않은 또다른 규제다.
朴在潤(박재윤)전 통상산업부장관은 청문회에서 『한보가 러시아 가스전사업과 관련, 정부를 비난하는 언론플레이를 해 鄭譜根(정보근)회장을 장관실로 불러 나무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일부 언론보도를 이유로 대기업 회장을 호출하는 장관, 아무소리 못하고 불려 들어가는 대기업 회장의 모습은 경제부처가 외치는 규제개혁이 큰 실속은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하는 장면이다.
金光雄(김광웅)서울대 행정대학원교수는 『한보사태는 정치적인 사건인 만큼 사법적인 면에서 공무원이 져야 할 책임은 많지 않을 수도 있다』며 『설령 법절차상 하자가 없더라도 국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정치권의 외압을 거부할 수 있는 공직자상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이용재기자〉
―4부 「경제표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