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의 주역은 역시 시민과 학생이었다. 그러나 항쟁의 성공은 숱한 고비마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던 의인(義人)들과 시민 학생의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조직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朴鍾哲(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최초 경찰 발표는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吳演相(오연상·42)박사의 증언으로 거짓임이 탄로났다.
『박군이 숨진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고 폐에서 수포음(水泡音)이 들렸다』는 오박사의 증언을 동아일보가 특종보도함으로써 「단순사고사」로 몰고가려던 경찰의 기도를 무산시켰다.
용산병원에서 지금도 진료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는 오박사는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법의학적으로 박군이 물고문으로 숨진 사실을 공식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 黃迪駿(황적준·52)박사. 황박사는 박군의 사인을 「심장쇼크」로 조작하도록 강요당했지만 가족들의 잠든 모습을 보며 「정의의 편에 서겠다」고 결심, 진실이 담긴 부검결과를 내놓았던 것.
현재 고려대 의대 부학장으로 법의학연구소장도 맡고 있는 황박사는 『박군의 사인에 여러가지 요소가 포함돼 있어 법의학의 좋은 사례가 된다』며 『박군 부검결과를 강의에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박사는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나의 직업의식』이라며 『현 사회의 혼란은 직분을 떠난 월권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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