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김용서/간첩이 활개치는 나라

  • 입력 1997년 11월 26일 08시 17분


저명한 대학교수의 고정간첩 사건이 또 터졌다. 우선 놀랍고 우울하다. 36년간이나 간첩생활을 했다 하니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제공했을까. 그보다 그간에 구축됐을 것으로 생각되는 인맥과 세력이 두렵다. 누구를 믿으랴. 불신풍조만 심화될 것이다. 고독이 피신처가 되고 분열이 판을 치며 냉소적인 분위기에 싸일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이 땅에 냉전이 엄연히 생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치 냉전이 종식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것은 잘 살고 안정된 먼나라들의 얘기다. 이 땅에는 지금 눈에 보이는 위기와 눈에 안보이는 위기가 각각 병행하면서 어느날 한꺼번에 파국을 조성하려는 대기상태임을 이 사건은 말해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무서운 상황에 직면하고도 우리 모두가 위기불감증에 중독돼 그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왜 하필 대선시기에 이 문제가 터지나 곤혹스러워한다. 될수록 사건이 축소되기를 바란다. 또 축소시킬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한다. 모두 근시안적인 이해타산만 앞세운다. 나라의 둑이 무너져도. 경제가 구조적으로 붕괴되고 있는데도 우리의 기초가 튼튼해서 걱정이 없다는 식이다. 어느날 지하철이 전부 마비되고 통신이 두절되고 전기가 전부 나가고 수돗물에 독극물이 풀려 있을 때, 생화학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면서 적의 게릴라부대가 기습을 감행해 오는 작전계획이 착착 준비되고 있어도 위기의식은 실종상태다. 예방작업을 하자면 직장일이 바쁘다고 불평이고 빠진다. 위기를 강조하면 피해망상증으로 몰린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책략정치가들과 설익은 지식인들이 온통 사회의 가치를 혼동시키고 우선순위를 흩뜨렸기 때문이다. 적은 적개심에 불타고 있어도 우리는 경계심조차 희미한 상태다. 민족에 대한 애정과 사상적 적대관계를 혼동한 감상주의자들 탓이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인척관계나 개인적 약점을 계기로 접촉이 지속되는 동안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는 사상이나 이념에 의한 결단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튼튼하고 힘차게만 발전한다면 그러한 세력이 널려 있다 해도 큰 문제가 될 수 없다. 사회의 구성원이 각각 이 체제에 실망하고 좌절하거나 저주하고 파괴심리가 작용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모든 구성원이 이 사회를 크게 잘 되게 하기는 힘들어도 각자가 자기의 해당분야에서 이 사회를 파괴하기는 쉽다. 그것이 현대적 전문화 사회의 고독한 군중과 냉소적 엘리트의 특징이다. 모두가 서로 귀한 줄 알고 양보하며 서로 돕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지도층은 「고통은 모두가, 권익은 나 혼자만」의 태도를 정반대로 바꿔야 한다. 있는 자가 더 많이 부담하고 높은 자가 더 어렵고 빛 안나는 일을 솔선해서 선도하는 분위기를 착실히 만들어갈 때 고정간첩들은 조국을 배반할 이유와 명분이 없어진다. 국민도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의욕이 생기고 그래야 경각심이 고조될 것이다. 김용서(이화여대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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