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광고회사 채모차장(35·경기 성남시 분당구).
지난달 26일 오전 출근하자마자 사업본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오늘 점심이나 같이 하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설마 결혼도 미룬 채 회사일에 파묻혀 온 내가…’라는 생각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본부장은 식사를 마칠즈음 아무말 없이 퇴직 안내서를 건넸다.
사무실로 돌아와보니 같은 팀 남녀 대리 2명도 이미 부장에게서 해고사실을 통보받은 상태였다. 임신 8개월인 여자 대리는 넋나간 표정이었다.
마지막 회의를 소집한 부장은 연신 눈물을 훔치며 “정말 미안하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팀원 모두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한 대리는 “해고되면 당장 은행으로부터 빚 독촉에 시달릴 게 뻔하니 퇴직금을 당장 못받더라도 무급휴직을 시켜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
중견기업의 부장이던 홍모씨(42·서울 양천구 목동)는 지난달 31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해고통보를 받고 짐을 정리해 집으로 돌아오니 “아빠 왜 짐을 들고 와. 일하려면 이 짐을 다시 회사로 가져가야 돼잖아. 다시 짐을 회사에 갖다 놔”라며 떼를 쓰던 초등학교 2년생인 딸,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하늘만 연신 바라보던 아내.
정식으로 해고통지조차 받지 못하고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도 많다.의류업체 영업관리부에서 근무하던 방모씨(28·여).
지난달 24일 “모두 사표를 내고 사장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자”는 부장의 말에 ‘설마…’하며 사직서를 썼다. 그러나 사흘 뒤 자신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소문으로 알게 됐다.
중소건설업체 차장으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전화 한 통으로 7년간 일해 온 직장에서 해고당한 박모씨(46·서울 송파구 가락동).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 퇴직 압력에 밀려 사표를 쓰고 신혼여행 내내 울어야 했던 최모씨(26·여).
출산휴가를 갔다와보니 이미 해고돼 있었다는 김모씨(29·여). 심지어 사내 컴퓨터 전자우편으로 해고를 통보받은 한 제당업체 간부 황모씨(49·서울 서초구 반포동) 등등….
실업의 충격은 직장인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관광회사 버스기사로 20년 무사고를 자랑해 온 문모씨(43·서울 구로구 구로동)는 해고당한 설움에 지난해 11월 20일 평소 못마시던 소주를 몇 잔 마시고 귀가하다 경찰에 적발돼 난생 처음 운전면허를 취소당했고 벌금 70만원까지 물게 됐다.하루도 안돼 직장과 유일한 생계수단까지 빼앗겨버린 채 경찰서에서 풀려난 오전 4시. 죽을 결심으로 경찰서 앞 다리 난간까지 갔으나 갑자기 떠오르는 4남매의 얼굴에 발길을 돌렸다.
실업은 연령 직종 직위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명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줄곧 출세가도를 달려온 국내 굴지의 대기업 상무이사 김모씨(52). 임원으로서 “정원이 넘치는 배는 가라앉는다”며 해고의 칼날을 휘두르던 그도 지난해 9월 창업주 2세가 취임하며 자신에게 돌아온 해고의 ‘부메랑’을 피하지 못했다.
해고의 순간보다 실업자의 가슴을 더 죄는 것은 가족에게 해고 사실을 알리는 일. 이 순간이 두려워 아직도 가족에게 숨기고 공원이나 산을 배회하는 사람도 많다.
용역회사에 다니다 지난달 1일 해고된 배모씨(52).
처음에는 대장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아내에게 충격을 줄까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내가 퇴원한 뒤 신정연휴 때 가족에게 알리려 했으나 고등학교 1년생인 막내아들의 세배를 받고 나서는 차마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며칠 뒤 아내는 해고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으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난달 임신복 생산업체에서 해고된 김모씨(46)는 퇴직금으로 받은 3개월치 봉급을 아내에게 주며 “3월까지 돈을 못 가져올 것 같다”는 말로 대신했다.
정신과 전문의 최병호(崔秉浩)씨는 “실업의 파괴력은 단순히 직장을 잃는 차원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총체적 자존심을 박탈당한다는데 있다”며 “실직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가정과 사회의 적극적인 배려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