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은 항일의병투쟁의 선구자 김상옥(金相玉)의사가 1923년 정초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마지막 남은 한 발의 권총탄환으로 자결한 지 75주년을 맞는 날이다. 일제 식민통치의 원흉 사이토총독에 대한 암살을 두차례 기도하다가 순국한 것이다.
당시 의거를 동아일보 호외기사는 ‘계해벽두(癸亥劈頭)의 대사건 진상’이라는 표제아래 의거경위와 진상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김의사는 단순한 혁명투사, 또는 항일독립투사만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구한말 국채보상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맥락을 잇는 일화(日貨)배척과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켜 말총모자와 새로운 농기구 등을 창안, 생산하면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김의사가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23세 때로 국권이 상실된 경술국치(庚戌國恥)로부터 얼마 안되는 1913년부터였다.
그는 이 무렵 항일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결성, 일제 요인총살 및 친일민족반역자 처단 등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혁신단’ ‘암살단’을 잇달아 조직, 일제 고관 및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단을 기도하였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사이토총독 암살을 계획했다가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2년 11월 김의사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거계획을 세운 뒤 사이토총독이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東京)로 갈 때 총살키로 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그의 국내잠입을 알아차린 일경의 엄중한 경계로 이 계획은 시일을 끌게 됐다.
김의사가 한 동지의 집에서 은신하던 1923년 1월22일 일경이 들이닥쳤다. 그는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쥐고 일경 10여명을 살상했으나 마지막 남은 탄환 1발을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순국했다.
김의사의 의거는 3.1독립운동 이후 목숨을 건 의열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이로부터 비롯되는 의열투쟁의 표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김창수(경원대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