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김영철/벼랑끝의 희망

  • 입력 1998년 1월 24일 20시 39분


20여년전, 한편에서는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맛보아야 했던 70년대의 모습을 뒤로 하고 미국 길에 올랐던 일이 바로 엊그제만 같다. 미국에 정착한 이후 나는 조국의 눈부신 발전이 세계적 축제인 올림픽까지 자신있게 치러내는 것을 보고 멀리서나마 눈물을 글썽이며 자랑스러워 했다. 그때는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스러웠고 어디 가서도 ‘코리안’인 것을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미국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온 조국은 전혀 생소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서구의 합리적인 사고와 근검절약하는 생활 태도를 직접 체험하고 몸에 익혀 돌아온 나의 눈에 비친 국민소득 1만달러가 조금 넘은 조국의 씀씀이는 이해하지 못할 것 투성이였다. 어느 백화점에서 열리는 ‘세기의 보석전’이 발디딜 틈 없이 붐빈다는 것, 그리 춥지도 않은 나라에서 너도 나도 밍크코트를 몇백만원 몇천만원씩 들여서 사는 행태들 말이다.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거리에는 온통 대형차들이 판을 치고 있었으며 여기 저기에 가득 차 있는 허세와 허풍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기실 요즘에 맞닥뜨린 난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라는 멍에를 둘러쓴 민족으로 전락해 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구멍가게에서 부터 크고 작은 기업, 가정에 까지 파고들어 이제 이 IMF 한파를 겪지 않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직장인들의 감봉은 시작일 뿐이고 금년 상반기동안 정리해고자가 기업에서 쏟아져 나와 이제 우리 주위에서 많은 실업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런데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20여년만에 돌아온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멋진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소위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아나바다 운동’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온 국민이 동참하여 ‘나라살리기 금모으기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은행 창구마다 평소에 소중히 간직했던 기념 금붙이를 가지고 나와 줄을 서는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어떤 70대 노인은 금니까지 뽑아 가져오니 이 나라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애국심이 아닌가. 감탄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병원계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환차손으로 인한 손해도 손해지만 진료 재료의 부족은 말할 나위없다. 그런데 얼마전 우리 병원의 이사장(성광의료재단 차경섭박사)과 아들(차광렬 포천중문의대 초대총장)이 4백억원 상당의 개인 재산을 선뜻 재단과 학교에 기부했다. 차이사장은 작년부터 포천중문의대를 세워 의예과 신입생에게 6년간 등록금 면제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실향민으로 주위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것이 늘 감사함으로 이어졌고 사회로 부터 받은 혜택을 다시 환원하여 갚고자 평생 모은 재산 전부를 기증한 것이다. 병원은 영리단체와 달라서 현행법상 한번 기부한 개인재산은 환수받을 수 없는 특징이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너도 나도 작은 것 하나라도 아껴쓰고 금을 모으는 것에서 부터 40년을 바쳐 이룬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거리낌 없이 헌납하는 노의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IMF를 졸업하고 세계 속으로 전진하고 있는 듯 함을 느낀다. 벼랑 끝의 위기에서 다시 일어서는 시작점이다. 잠시 곁 길로 나가고 가끔 한눈을 팔긴 하지만 결코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는 우리의 민족성을 믿기에 내겐 여전히 자랑스런 조국인 것이다. 김영철<분당 차병원 내과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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