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 합의에 따른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등의 실시는 상품시장에 이어 노동시장에도 ‘인력의 공급과 수요’ 및 ‘노동의 품질경쟁력과 가격경쟁력’ 등 시장원리가 작동하게 됨을 뜻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노동 토지 등 생산요소 분야에서는 시장경쟁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 점이 고비용―저효율구조의 한 원인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계기로 앞당겨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도입은 우선 기업과 은행 등의 구조조정을 가속할 것이 분명하다. 또 중장기적으로 경제시스템 전반의 개편을 촉진할 전망이다.
재정경제원 이철환(李喆煥)인력개발과장은 “노동시장에서 시장경쟁원리가 작동하면 근로자 스스로는 물론이고 기업 차원에서도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가 크게 늘어나게 될 것”이라며 “축적된 인적 자본은 21세기 지식정보산업의 육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동상품이 다양해진다〓‘한 직장에서의 평생 근무’라는 근로의식과 고용관행이 크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 대신 파견근로, 계약직, 시간제 근로, 재택(在宅)근로 등 다양한 노동형태가 본격적으로 확산될 전망.
기업측은 여러 형태의 노동상품을 적절하게 결합해 생산성 극대화를 꾀하게 될 것이다.
근로자 입장에서 볼 때도 고용의 안정성은 크게 떨어지지만 여러가지 형태의 피고용 기회에 대한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한편으로는 재벌의 노동력 독점구조가 깨지게 된다. 재경원 이철환과장은 “그동안은 재벌과 정부부처가 ‘종신고용 신화’를 무기로 고급인력을 독점해왔지만 앞으로는 직장간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중소기업 벤처기업 등이 보다 쉽게 고급인력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전망.
▼인수합병(M&A)이 촉진된다〓부실덩어리로 전락한 금융산업에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쉽게 이뤄지게 된다.
조흥은행 Y상무는 “지금까지 은행 M&A의 가장 큰 걸림돌은 정리해고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며 “이 문제가 해소된만큼 올 하반기부터 금융기관간 M&A가 본격화하면서 내년에는 대형 시중은행의 합병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은행들은 합병을 통해 막대한 전산관련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게 된다.
합병은 상호보완적 업무를 강화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감원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핵심.
미국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사례를 보면 전직원의 3분의 1이 해고됐다.
한 시중은행 인사부장은 “인수합병시 필수 감원 대상은 피합병기관의 본부 및 전산인력 대부분과 폐쇄되는 점포의 인력”이라며 “기존 점포의 3분의 1 이상의 폐쇄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와 관련, 금융노련 관계자는 “금융권의 경우 올해 대규모의 명예퇴직을 실시했기 때문에 추가 감원은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 단체협상 등을 통해 정리해고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업들도 구조조정에 본격 착수하게 된다. 기업들은 경제운용이 IMF 관리하에 놓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사업부문을 유망분야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재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잉여인력의 대량 감원 없이는 사실상 어렵다.
대우경제연구소 이한구(李漢久)소장은 “앞으로는 근로자파견제와 고용조정제(정리해고제) 등을 활용해 필요한 인력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시간만큼만 쓸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경박단소(輕薄短小)형 산업이 힘을 얻는다〓노동시장의 변화는 산업구조의 변화로 이어진다. 현재의 조선 자동차 등 중후장대(重厚長大)형 산업구조가 정보통신 소프트웨어 등 경박단소형 산업구조로 상당부분 바뀌게 될 것이라는 전망들이다.
노동시장이 경직적일 때는 중후장대형 산업에 인력이 몰리기 쉽다면 경박단소형 산업은 유연한 노동시장에 훨씬 잘 맞기 때문.
재경원은 노동시장의 경쟁촉진으로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증대를 기대하고 있다. 이같은 인적 자본은 다양한 벤처기업의 육성기반이 될 것이라는 분석.
재경원 관계자는 “산업사회가 지식사회로 옮아가면서 지식 정보가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로 등장했다”며 “노동시장 개혁은 이같은 인적 자본을 육성하는 전제조건”이라고 말했다.
이한구소장도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는 국내 경제를 미래형 산업구조로 개편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임규진·천광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