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 노트]김세원/「도덕적 범죄자」

  • 입력 1998년 3월 28일 20시 28분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친 도둑에게 그 백화점 앞에서 자신의 범죄사실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서 있게 하기. 아내를 폭행한 남편은 여성단체 회원들 앞에서 아내에게 공개사과하도록 하기. 성추행범에게 지역신문에 자신의 얼굴사진과 함께 참회광고를 내도록 하기….

요즘 미국법조계에서는 이른바 창의적 판결이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고 있다. 구속이나 벌금형과 같은 단순한 징벌로는 범죄 방지에 한계가 있으므로 범죄자들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징벌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텍사스주의 한 판사가 음주운전으로 두 명을 숨지게 한 10대 청소년에게 실형을 면제하는 대신 내린 선고는 창의적 판결의 전형을 보여준다. “법원 청사앞에서 ‘저는 음주운전으로 두 사람을 숨지게 했습니다’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5일동안 서 있을 것. 사고 지점에 희생자의 추모비와 십자가를 세우고 관리할 것. 10년동안 희생자의 생일날 무덤을 찾아 헌화하고 희생자의 사진을 지갑속에 넣고 다닐 것. 희생자의 시체 부검에 입회할 것.”

창의적 판결은 우리 사회에 날로 늘어나는 도덕적 범죄자들을 줄이는데도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범법행위를 해야만 범죄자인가. 말로만 고통분담을 외치면서 돌아서서는 이권챙기기에 급급한 우리 사회의 이른바 지도층들, 주식 부동산 폭락에 고금리를 활용해 떼돈벌기에 열올리는 일부 부유층들…. 어엿한 중소업체의 사장님이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전락해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고, 실직한 샐러리맨이 서울역 지하도의 무료급식 대열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충격적 현실도 이들에겐 강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이들에게 일주일만이라도 행려자 무료식당에서 밥을 퍼나르게 하든지, 새벽 인력시장을 돌아다니도록 국민의 이름으로 창의적 판결을 내릴 수는 없을까.

김세원<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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