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 무너진다 下]생업에 찌들리는 주부들

  • 입력 1998년 5월 1일 21시 00분


취업주부인 구모씨(35·여)는 자신의 일터인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퇴근하기 전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구씨는 최근 집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 됐다. 툭하면 남편이 주먹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중소 건설회사의 과장이었던 남편이 1월 실직, 구씨는 2월부터 한식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처음에 남편은 협조적이었다. 청소도 해주고 아이들도 잘 돌봤다.

그러나 3월 중순 남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짜증을 내고 시비거는 일이 잦아졌다. 급기야는 “내가 돈 못번다고 무시하는거냐”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점차 의처증도 생겼다.

서울 여성의 전화에는 올들어 ‘경제적 위기’로 인한 가정폭력 등의 상담 사례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작년 한해동안 ‘경제적 위기’로 인한 상담사례는 총 1백39건. 하지만 올해는 1·4분기에만 벌써 1백88건의 상담이 접수됐다.

빠듯한 수입을 쪼개가며 알뜰하게 살림하는 것만이 주부의 미덕인 시절은 지났다. 실직한 남편 대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고 남편의 좌절감과 불안도 적절히 달래줘야 한다. 또 아이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IMF시대의 주부는 이같은 3중의 부담을 떠안고 있다.

남편의 실직과 폭행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몰리지 않더라도 IMF시대에 주부노릇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주부가 가계에 한푼이라도 보탬이 되겠다고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허탕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 서부노동사무소에는 여성구직자가 3월 4백50여명에서 4월 5백70여명으로 26%나 늘었지만 일자리를 구한 여성은 한달 평균 2, 3명에 불과하다.

실직한 남편과 자녀가 주부의 취업 같은 역할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례도 있다.

전업주부였던 홍모씨(50)는 레미콘 운전기사인 남편이 작년 11월부터 전혀 일거리가 없자 올 2월부터 파출부로 나섰다. 서울 강남구 아파트 2곳에서 버는 일당은 5만5천원. 최근에는 파출부를 일주일에 3일만 나가고 3일은 보험설계사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남편과 외아들의 격려 덕분에 두가지 일을 해도 힘든 줄 모른다. 한번은 남편이 결혼생활 20년만에 처음으로 저녁밥을 지어놓아 홍씨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고등학생인 외아들도 “엄마, 힘들텐데 집청소 하지 말고 그냥 주무세요”라며 제법 철든 얘기만 골라한다. 홍씨는 “남편이나 아들이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이해해 주는 것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소비자인간발달학과 박성연(朴性姸·51)교수는 “주부가 마치 슈퍼우먼인 것처럼 모든 부담을 떠맡겨서는 안된다”며 “어려운 때일수록 가족 구성원이 새로운 상황에 맞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정보·이완배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