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저문 뒤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 개운하게 목욕하고 마른 이부자리에서 발을 뻗어보는 것이…. 그러나 깔끔한 방이 오히려 낯설다. 잠버릇 나쁜 아이와 샴푸냄새 향긋한 아내가 곁에 없어서일까….
18일 저녁 8시가 되자 하루종일 일거리를 찾아다니던 남자 실직자 52명이 서울 영등포구 근로자 합숙소에 모여 들었다.
합숙소 생활 사흘째인 김모씨(34).
샤워하고 양말빨고 이곳에서 나눠준 체육복을 입고 식사를 마친 뒤 담요자락을 깔고 앉아 숨을 돌린다.
“조그만 출판사를 경영했는데 부도가 났습니다. 아내와 두돌지난 딸은 처가에 보냈어요. 기반을 잡으면 다시 모여 살아야죠. 영업이나 관리직 쪽을 알아보고 다니는데 쉽지가 않군요.”
노랗게 물들인 머리가 지저분하게 자란 홍모씨(25).
“올해 대학을 졸업했어요. 아버지회사가 부도난 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지방 친척집에 내려가 있습니다. 왜 서울을 떠나지 않느냐고요? 장남이거든요.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죠.”
친구와 후배집을 옮겨다니며 숙식을 해결해온 홍씨는 하루종일 컴퓨터 관련 회사에 원서를 내고 다닌다.
말이 없기로 소문난 강모씨(44). 반도체 회사에 다니다 실직한 후 이혼까지 당한 상처가 입을 다물게 했을 거라는 게 합숙소 상담원의 귀띔이다. 저녁식사후에도 TV앞에 앉는 법이 없다.
더벅머리 노총각 최모씨(37). 시골에 남겨두고 온 병든 아버지를 하루빨리 모셔와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배운 것이 없으니 해먹고 살게 있어야지요. 경비라도 서볼까 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돌아가고 저한테는 차례가 안와요.”
밤 10시 취침시간. 오전 6시엔 일어나야 하는데 사람들은 쉽게 잠이 들지 않고 자정이 넘도록 뒤척거린다.
〈이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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