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24시 르포]『일자리 없어도 육체노동 어떻게…』

  • 입력 1998년 5월 25일 20시 02분


실직 노숙자들은 비록 빈털터리지만 좋은 의미든 아니든 ‘자존심’만은 대단했다. 남에게 노숙자로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이가 많고 궂은 일은 아직도 손대지 않으려 한다.

재기를 위해 절치부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육체노동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일자리가 없다”며 정부와 사회만 탓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최악의 실업사태속에서도 3D업체에서는 구직난을 겪고 있다. 업주들은 고국으로 돌려보낸 외국의 불법 체류자라도 불러들여야할 형편이라고 말한다.

▼ 19일 ▼

오전 8시경 경남 삼천포에서 올라온 40대 여자가 서울역광장을 돌며 공사인부를 구하고 있었다. 노숙자들중 공사장 인부출신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값싼 숙련인력을 구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노숙자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숙식을 제공해주지 않는 조건으로는 일당 4만원에 먼 길을 떠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일부 노숙자들은 “서울역노숙자들이라고 무조건 싸게는 안따라 간다”며 버티는 모습이다.

노숙생활에 익숙해지고 무료급식 기회가 늘어나면서 근로의욕을 잃은 때문이다. 최소 월 1백만원 가까이 보장되는데도 나서질 않는 것이다. 오후4시경 서울역광장에 주차된 사회복지단체 ‘사랑의 전화’실직자상담차량 앞에서 40∼50명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상담소에는 월 60만∼70만원정도의 구인의뢰가 많이 들어와 있다. 건물경비나 청소, 외국인 근로자들이 하던 일자리다. 하지만 구직자들은 지하도에서 새우잠을 자고 무료급식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자리는 “가지 않겠다”며 버티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돈 조금 받고 하루종일 공사판에서 땀을 흘리느니 차라리 맘편히 빌어먹는 것이 낫다’는 식이다.

‘사랑의 전화’ 안은아(安恩兒·32)사회복지사는 “많은 노숙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 생활에 안주해 취업의욕을 잃고 있다”며 “취업알선과 함께 취업의욕을 복돋우는 심리상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20일 ▼

노숙자들의 전직은 공사장인부 식당종업원 공원 등이 대부분이었지만 자영업자와 회사원 등 고학력실업자도 더러 눈에 띄었다. 이들은 일용직 근로자들과는 달리 노숙생활을 꺼려 서울역 인근 하루 4천∼5천원이면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심야만화방과 여인숙 등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또 IMF이전부터 서울역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던 ‘토착부랑자’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오전 7시경 서소문공원에서 만난 정모씨(37)도 대졸학력의 실업자. 지방 출신으로 국립대를 나온 정씨는 경기 부천시에서 플라스틱제품 제조업체를 경영하다 지난해 부도를 냈다. 그는 채권자들의 빚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고향으로 내려보내고 재기를 다짐하며 3월말 이곳으로 왔다.

처음에는 “내가 그래도 사장이었는데…”라는 생각에 막노동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나 이제는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게 됐다. 정씨는 하지만 오늘도 ‘번듯한’직장을 구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세수 면도와 양치질을 빠뜨리지 않고 구호기관에서 얻은 옷일망정 깨끗하게 빨아 갈아입는다.

정씨는 다음날부터 실직자합숙소인 ‘보현의 집’에 입소할 계획이라며 서울역구내 실직자상담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21일 ▼

오후 5시경 서울역구내 실직자상담소를 찾았다. 지난달 13일 문을 연 이 상담소에는 매일 상담직원 2,3명과 자원봉사자 4,5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인원부족으로 하루 12시간이상 근무하며 동분서주하지만 건강상태 급식환경 등 실직자들의 실태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20여만원인 상담소운영비도 개소 한달이 지난 뒤에야 지원하고 상담직원에게 일당 3만원, 자원봉사자에게 교통비조로 5천원정도를 지급하는 게 고작.

노숙자들을 따라 함께 가본 영등포근로자합숙소에서도 실직자문제에 관한 정부의 대책 소홀을 엿볼 수 있었다. 합숙소직원들은 16일 개관 뒤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일해온 듯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이들은 “정부와 서울시가 합숙소를 개보수 해준 것 말고는 현장에 와보지도 않았다”며 “합숙소내 설비들을 운송해오는데 반나절이면 될 것을 서울시 각 부서의 결재를 거치느라 이틀도 더 걸렸다”며 공무원들을 비난했다.

▼ 22일 ▼

용산역에서 점심을 먹은 뒤 정오경 급식소 옆의 무료진료소를 찾았다.

실직노숙자들에게는 각 구청보건소나 국립의료원 등이 실시하는 이동무료진료소가 거의 유일한 의료서비스이지만 피검사 혈압검사와 감기 몸살 등 단순 진료가 고작이다. 50세 가량의 남자를 진찰한 의사는 “심장질환이 있는 것 같은데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 후 치료를 받으라”는 ‘대책없는’ 진단결과를 내놓았다.

오후2시경 서울역광장에 진료활동을 나온 국립의료원 김재화(金在化·36·정형외과 전문의)진료봉사단장은 “실직노숙자들은 불결한 위생환경과 폭음, 영양부족 등으로 위장병과 폐결핵 등 질병의 양상이 일반인들과 사뭇 다르다”며 “실직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중증환자인 실직노숙자를 치료할 전문의료기관을 확보하는 등 의료복지체계를 하루빨리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후 4시경 택시를 타고 서울역을 빠져나왔다. 지나간 1주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내가 과연 실직자들의 고통과 아픔에 얼마나 진정으로 동참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5분쯤 가다 택시에서 내렸다. 서울역에 남겨진 실직노숙자들은 언제쯤 자립할 수 있을까. 터벅터벅 신문사 사회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대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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