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잠깐만]양희선/부모 무책임에 시드는 아이들

  • 입력 1998년 5월 27일 07시 00분


얼마전 회사 일로 서울지방법원에 들렀다. 업무를 모두 마치고 가정의 달에 가정법원을 찾는 사람은 어떠한 표정일까하고 궁금하여 잠시 들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정법원을 향해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칠순을 넘긴 듯한 할아버지가 지팡이에 의지하며 계단을 내려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대뜸 앞서가는 할머니를 향해 “그 연금은 내꺼야. 당신이 왜 손대려고 해 당신과는 상관없어”라고 했다. 굳은 표정의 할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훔쳐보며 왠지 삶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계단을 다 올랐는데 교복을 입고 가방을 맨 중학교에 다닐 것 같은 학생의 심각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이 시간은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인데…. 법정 통로에서 어머니인 듯한 사람과의 대화, 재판을 기다리며 불안하고 초조해 하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 그 사이로 들려오는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이혼 때문에…” “혼자오셨습니까” “네” “시간이 오래 걸리겠는데요” 등의 차가운 대화.

어린 아가는 아빠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고 웃음을 상실한 시간과 공간사이로 변호사는 그들의 지난 인생을 규명하고 증빙하기 위해 법정으로 가는데….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말한다. 가정법원 안내판은 십중팔구 이혼과 관계된 사건들로 나열돼 있다. 궁핍한 삶과 불행의 끈을 제거하고 새로운 행복을 시작하기 위해서라고 이혼 사유를 말하기엔 지나온 시간에 대해 너무 무책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양희선(서울 성북구 종암2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